엄마. 청첩장 만드는 중인데.
아빠 이름 넣어 말어?
내 질문에 엄마의 대답이 어땠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론 의자 뺏기 게임처럼, 사이좋은 시부모님 이름 아래 엄마의 이름 하나만 넣어 청첩장을 주문했다. 남편의 반응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3년도 더 지난 일이기에.
아빠라는 존재의 부재는 크면서 내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집안의 큰 손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핵인싸 재질인 내겐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친구들이 끊임없이 많았으며, 놀랍게도 내가 살았던 동네엔 유난히 한부모가정이 많았다. 어느 해엔 함께 놀았던 친구 넷 중 셋이 한부모가정인 경우도 있었다. 우린 나라에서 지원을 해줘야 하는 어려운 아이들이 아니라, 아빠가 있는 사람이 특이한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나누는 철없게 발랄한 여고생들이었다.
추위도 채 가시지 않은 꽁꽁 언 봄에 새내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신나게 떠났던 첫 엠티 날 밤, 선배들이 억지로 먹인 술에 만취한 내가 몇 남지 않은 선배들 틈에서 아빠의 부재에 대해 목놓아 울며 부르짖은 이후론 굳이 엄마 손에 자랐단 이야길 할 일도 없었다. 나뭇가지가 무성해지듯 서로의 관심사와 진로도 점점 멀어져 사회로 울창하게 뻗어나갈 뿐, 누구네 사정이 어떤지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갠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이제 막 말을 틀 때쯤 헤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가 집을 나갔고, 어린 나를 키워야 했던 엄마는 그때 살던 친할머니 집에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준비를 한 후에야 비로소 나와 단 둘의 삶을 꾸려낼 수 있었다. 인생의 90% 동안 아빠가 없었기에 내게 아빠란 존재는 원래 없던 것처럼, 있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청첩장에 찍어 넣어 시부모님의 친지들, 남편의 친구들, 그리고 내 친구들에게까지 공표해야 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부지불식 간에 숨 가쁜 삶을 살아내고 있을 때, 문득 아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정리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내 삶에 아빠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인 것도 아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10여 년에 한 번씩 찾아와 얼굴만 보고 떠났다고 전해 들었을 뿐, 그 이상의 연락이나 교류는 없었다고 한다. 죽지도 않은 아빠의 이름 앞에 '故'를 붙여 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십 년 간 나를 길러낸 눈물과 땀이 만든 고결한 이름이 올라야 할 자리에 함부로 넣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도, 내게 그것은 엄마를 모욕하는 것과도 같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아무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허전한 청첩장을 받고 놀란 사람도 꽤 있을 테지. 서울로 대학에 온 후, 고만고만했던 형편이었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다르게 하늘과 땅 차이의 재력을 가진 수많은 선후배들 틈에서 엄마와만 살아온 내가 한없이 작아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엄마는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나를 키웠고, 그것은 부부가 함께 한 아이를 길러낸 것보다 두배가 아닌 세네 배는 어려웠을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날의 신부, '나'라는 소중한 사람을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한 것은 오롯이 우리 엄마의 노고 덕이었다는 것을.
나는 청첩장에서 아빠 이름을 뺐다.
나라는 사람을 이 세상에 세운 엄마의 이름이 더욱 빛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