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줄 알았는데
방송작가? 생명공학?
방송작가인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생명공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밝히면 대부분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작가와 생명공학은 커피와 팔보채처럼 연관성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아니 실제로 연관이 전혀 없는 단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알아온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나 방송작가가 되었어'라고 하면 '그럴 것 같았다'라는 반응이 더 일반적인 편이다. 말인즉슨, 생명공학을 꿈꾸다 작가가 된 게 아니라 작가를 꿈꾸다 잠시 생명공학에 한 눈을 팔았다는 뜻이고 그 시점은 이과와 문과를 결정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는 23살까지로 강산이 절반 정도 변할 수 있는 꽤 긴 시간이다.
'문과 가면 치킨집 한다'
는 말이 지금은 농담처럼 널리 퍼져있지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07년에는 그런 말이 그다지 유명하진 않았다. 수학도 싫고 영어도 싫어 이과와 문과를 갈팡질팡하던 고등학교 1학년 어린양들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일타강사 뺨치게 화학을 재밌게 가르치던 화학 선생님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수업과 찰진 말솜씨로 과학과 실험관찰만을 배워오던 우리에게 '화학'의 세계를 아주 재밌게 보여주었으며 틈틈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문과 가면 치킨집 한다'는 논조의 말을 섞어 그전까지 7:3이던 문, 이과 진학 비율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장본인이 되었다. 국어 선생님이나 방송작가, 작가가 꿈이던 (귀 얇은) 나 역시 문과에서 이과로 넘어간 비율 중 한몫을 차지했음은 불 보듯 뻔했다.
그 뒤야 흔한 스토리다. 죽어라 공부해서 그나마 흥미가 있었던 생물 쪽으로 전공을 택했고, 선배들처럼 열심히 놀멍 쉬멍 대학생활하다가 대학원 진학해서 연구원이 되는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러던 내가 어릴 적 꿈꿨던 '작가'의 길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된 건 당시 대유행이었던 김난도 교수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은 후였다. 그 책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 1/3은 잠을 자고, 나머지 2/3 중 1/3의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눈 뜨고 있는 시간 중 1/2을 차지하는 일하는 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인생의 절반을 불행하게 보내게 된다고 했다. 그 대목을 읽었을 때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아!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나는 소설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온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전적으로 서포트해줄 만한 여력이 부모님껜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몸 뉘일 방세를 내야 했고 먹고 입을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전공이 무관해도 진입할 수 있고, 지금껏 놀았으니 진입 장벽도 좀 낮고, 그런데 어쨌든 좀 폼은 나는(제일 중요) 글쟁이가 되고 싶었던 내게 방송작가는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었다. 큰 망설임 없이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머지않아 방송작가로 취업에 성공해 지금까지 그 일로 목숨을 훌륭하게 연명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딱히 멋이 없다는 점이랄까? 막상 방송작가가 되면, 매일 카페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방송국을 휘젓고 다니며 연예인과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핑크빛 상상과는 전혀 다른 업무 환경이 펼쳐진다. 매일 널뛰는 회의시간과 퇴근시간,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작가보단 잡가에 가까운 업무 내용, 글보다는 통화와 애걸복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상... 드라마 <프로듀사>나 몇몇 웹툰, 웹소설에 등장하는 방송작가를 보면 며칠 감지 못한 머리와 퀭한 눈을 한 실제 방송작가는 코웃음을 칠 뿐이다. 아니, 가상의 인물이라도 저렇게 멋있게 포장해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 멋없는데도 이 일을 8년 동안 해온 이유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 는 점도 있지만 멋없는 일을 치열하게 해 온 내가 점점 멋있어지는 것 같아서, 인 것 같다. 호숫가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가 수면 아래서 열심히 발을 휘젓고 있듯이 멋없고 멋없는 일들을 켜켜이 쌓아 만들어낸 내 방송이 전파를 타고 수많은 이들을 웃고 울릴 수 있다는 게 은근히 멋있다. 사실 무슨 일이든 멋있어 보이는 외면 뒤에는 숨은 멋없음들이 산재해있기 마련이다. 그런 수많은 멋없는 일들을 해나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대놓고 멋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멋있다. 우리 모두 오늘도 참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