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2022년, 신년 맞이 산행
지금은 12월, 2021년의 마지막 달이다. 2021년은 어떤 해였나. 작년에는 막연히 2021년엔 코로나가 끝나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마스크 뒤에 숨어있고, 자유로이 여행을 갈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2021년은 지지리 궁상맞은 해였다.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고 무력감만 느껴지던 그런 해였다. 그래서 올해가 끝나는 것이 아쉽기보단 속이 시원한 쪽에 가깝다. 나는 항상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많이 힘들었지만, 기쁜 날보다 속상한 날이 많았던 해지만 마지막까지 무기력한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 이전에는 친구, 가족들과 연말 파티를 하고 멀리 바다를 보러 가곤 했었는데 올해는 그런 것도 힘들어졌으니 가까운 곳으로 등산을 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연말·연초의 등산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렇게 나는 시흥과 인천에 걸쳐있는 소래산에 대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소래산은 해발 299.4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지하철을 타고 역 근처의 등산로 입구에서 출발할 것이기 때문에 집과 가장 가까운 시흥대야역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소래산 등산 코스>
시흥대야역3번출구 → 시흥ABC행복학습타운→ 소래산산림욕장 → 청룡약수터 → 마애보살입상 → 소래산 정상 → 만의골
어쩌다 보니 인천이 아닌 시흥에 있는 시흥대야역이 출발지가 되었다. 소래산은 시흥과 인천 사이에 걸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시흥대야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시흥ABC행복학습타운으로 향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마트에 들려 이온 음료를 샀다. 목을 시원하게 적셔줄 음료를 사니 그나마 마음이 든든해졌다. 등산로 입구로 가려면 시흥 ABC행복학습타운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처음엔 여기로 가면 등산로 입구가 정말 나오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주변에도 다른 등산객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소래산 등산로 입구를 향해 걷고 있으면서도 사실 이게 잘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일을 시작한 뒤로 운동을 오래 쉬기도 했고, 며칠 전 눈이 오고 나서 차디 찬 한겨울 날씨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마음을 새롭게 다잡기 위함이니까, 이것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괜히 2022년도 잘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차장 쪽으로 들어오면 소래산 산림욕장이 보인다. 넓은 잔디 들판과 귀여운 캐릭터 동상, 벤치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이들이나 반려동물과 함께 오면 좋을 듯했다. 곧장 산림욕장을 지나쳐 소래산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화장실은 등산로 입구 바로 옆에 있어서 급한 볼일은 해결하고 출발하면 된다.
걱정했던 바와 달리 등산로 초입은 깔끔한 돌계단과 잘 다져진 흙길이었다. 오랜만에 풀냄새 가득한 산길을 걸으니 조금 흥분이 되기도 했다.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안개가 끼어있는 멋진 산림욕장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울 산속은 소나무와 녹색 이끼를 제외하면 전부 빛바랜 주황색의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운치 있는 풍경에 힘을 얻어 다시 산을 힘차게 올랐다. 조금씩 숨이 가빠오긴 했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정신이 조금씩 드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서서히 몸에 열도 올라서 찬 바람도 더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흙길을 지나서 시야 위로 보이는 아득한 돌계단을 보니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싶었다. 이 코스는 돌이 울퉁불퉁하고 경사져 있어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상당한 체력이 요구되는 구간이다. 생각을 멈추고 발밑만 보며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하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산 중턱에 있는 배드민턴장에서 아줌마, 아저씨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배드민턴장이 있는 것도 놀라운데 여기서 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구나…’
이른 아침부터 산 중턱에 있는 배드민턴장까지 올라와서 운동하는 분들을 잠시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윽고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코스의 첫 번째 약수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매번 산에 오면 다양한 풍경을 보면서 생각한다.
'매일 이곳에 오는 사람들 진짜 대단하다, 그나저나 산에 있는 구조물들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잠시 뒤로 한 채 다시 발걸음을 떼며 끝도 없는 돌계단을 보니, 아직도 정상까지는 멀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한 산행인데 끝을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나온 두 갈레 길에서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이미 지쳐있던 나는 조금 더 쉬운 코스는 어디일까 번갈아 보며 고민 중이던 찰나, 바로 앞으로 등산복을 쫙 빼입으신 아저씨가 지나갔다. 이때다 싶어 바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소래산 정상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나요? 조금 더 편한 코스로 추천해주세요!”
헐레벌떡 길을 묻자 잠시 당황하시더니 더 편한 길은 오른쪽이라며 정상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드리니 아무런 대답 없이 쿨하게 가던 길을 따라 떠나셨다.
등산객 아저씨들은 왠지 모르게 츤데레 같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등산 코스에 대해 알려주는데 나중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떠나신다. 그 모습에서 산을 자주 다니며 쌓은 내공과 등산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진다. 등산 생초보로 보이는 젊은이가 길을 물어보니 얼마나 해줄 말이 많았을까 싶다. 상세한 설명을 해주셨던 등산객 아저씨께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오른쪽 길로 조금 더 올라가니 거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표지판을 보니 마애보살입상이라고 쓰여있다. 가까이서 보니 바위에 커다랗게 불상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기도를 하고 계신 분들이 보인다. 설명을 읽어보니 바위의 이름은 장군바위(일명 병풍바위), 크게 그려져 있던 마애보살입상은 보물 1324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불 조각이라고 했다. 종교가 없지만 속으로 2022년의 계획과 가족의 건강을 빌고 자리를 떴다.
마애보살입상까지 왔다면 소래산의 절반은 넘게 온 것이다. 글을 읽는 소래산 예비 등산객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진짜 등산 시작이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잘 닦여진 길이 아닌 진흙길, 돌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여러 등산객이 지나쳐가는데도 귓가에는 헥헥대는 숨소리만 들린다. 얼마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탓에 돌 사이로 진흙이 잔뜩 생겼다. 이 부분이 꽤나 미끄러웠기 때문에 발에 힘을 주고서 걸어야만 했다. 발바닥과 종아리가 본격적으로 아려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끝인가 할 때면 계속해서 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시야 끝에서 소래산 비석이 보였다. 드디어 정상의 코 앞 까지 온 것이다. 소래산 비석을 보는 순간 없던 힘도 솟아나서 그곳까지 빠르게, 더 힘차게 걸어갔다.
약 1시간 10분 만이었다. 드디어 소래산 정상에 도착했다. 누가 보면 해발 1,000m 이상은 되는 고산을 등산했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저질 체력인 나에게는 이것 조차 도전이었다.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것이 정상에서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만으로 모두 다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정상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세워진 소래산 비석 앞에 섰다. 이곳에서의 인증샷은 필수다. 정상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보면 아파트와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보이는 장관이 펼쳐지길 바랬었는데, 이날은 야속하게도 미세먼지가 가득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소래산 정상까지의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을 준비했다. 목적지는 음식이 가득한 거리인 만의골 은행나무길이다.
만수동에 있는 만의골은 소래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가 있고, 인천대공원 후문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소래산부터 성주산, 거마산은 모두 이어져 있고 만의골로 도달할 수 있어서, 이쪽에 있는 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는 꾸준히 사랑받는 곳이다. 만의골로 향하는 길은 만의골 은행나무길로 불리기도 한다. 공영주차장 옆으로 천연기념물인 오래된 은행나무가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만의골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식점을 떠올리지만 보호해야 할 자연유산이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했던 산행이라 배가 무척 고팠기에 바로 소래산면옥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동료가 이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면서 만의골 맛집으로 자신 있게 추천해준 곳이다. 소래산면옥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면 종류의 음식이 가득했다. 물론 해장국과 파전 등의 음식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들깨칼국수를 주문했다. 이곳의 들깨칼국수는 면을 손수 뽑아서 면발의 탱탱함과 쫄깃함이 살아있다. 특히 칼국수 종류를 주문하면 보리밥과 수육이 함께 나오는데, 더욱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다. 보리밥, 묵밥, 파전은 등산 후 먹기에 최적의 음식이 아니던가. 막걸리도 함께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다음 일정이 있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들깨칼국수가 나오기 전에 먼저 보리밥과 수육이 나왔다. 보리밥에 무생채와 콩나물, 열무김치를 넣고 초장과 참기름을 두 바퀴씩 돌리고 쓱싹 비벼주면 이만한 별미가 없다. 부드러운 보쌈과 함께 먹으니 그 맛이 배가 됐다. 어느 정도 보리밥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있으니 상당한 양의 들깨칼국수가 나왔다. 뜨끈하고 고소한 들깨칼국수를 먹으니 등산 후에 먹는 음식이 왜 꿀맛인지 알 것 같았다. 면발은 쫄깃하고 얇지 않아서 식감이 정말 좋았다. 특히 걸쭉하고 고소한 들깨 국물이 중독될 만큼 맛있어서 쉽게 숟가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오전 내내 산을 오르며 쌓였던 피로가 싹 녹아내려 가는 순간이었다.
등산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고 온 이번 소래산 산행. 연말 연초를 뜻깊게 보내고 싶다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근처 산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고생 끝에 만난 정상에서 느끼는 뿌듯한 기분이 2022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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