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 Jun 15. 2023

살인자를 배우로 섭외한 이상한 감독이 있다?

알튀세와 함께 <액트 오브 킬링> 보기

  당신이 영화감독이라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한 나라에서 무고한 사람 수십만 명이 살해당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싶어졌다. 당신은 그 나라에 방문해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시도한다. 그러나 학살자들이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는 현실은 피해자들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때 당신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정신 나간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피해자가 아니라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건 어떨까? 가해자들이 직접 배우 겸 감독이 되어 자신의 학살을 영화로 만들게 해 보자.’

인터뷰중인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출처: https://youtu.be/8GWJtKFGevM)

  위와 같은 정신 나간 생각을 실제로 옮긴 감독들이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을 제작한 조슈아 오펜하이머, 크리스틴 신, 그리고 익명의 인도네시아 감독이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을 숙청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 대학살의 주동자들을 찾아가 영화 촬영 협조를 요청한다. 학살자들은 놀랍게도 흔쾌히 촬영에 응한다. 촬영에 단순히 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할리우드 영화 장르의 연출 방식을 본떠 다채로운 방법으로 학살을 재연하고 미화한다.


공영방송 토크쇼에 나가 자신들이 촬영 중인 영화에 대해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학살 주동자들

  학살자들은 공영방송 토크쇼에 나가 자신들이 촬영 중인 영화를 소개한다. 방청석에는 학살에 앞섰던 무장단체인 판차실라 청년회의 회원들이 단복을 차려입고 앉아있다. 학살자 중 한 명인 안와르 콩고가 자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목을 졸라 살해했는지 떠벌이자 미소를 띤 방송 진행자가 명랑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네! 안와르 콩고 씨는 인도적인 방법으로 공산당을 처리하는 방법을 고안하셨군요!” 학살자들의 의기양양한 태도와 그들을 거리낌 없이 칭송하는 진행자,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판차실라 청년회의 모습은 마치 섬뜩한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진다. 학살자들은 애초에 극악무도한 양심을 타고났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르는 것인가? 그리고 거리낌 없이 학살자들을 반공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들도 도덕적으로 둔감한 양심을 타고난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공공연히 승인된 악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가 주장한 국가기구(state apparatus)의 차원에서 사태를 살펴보자. 알튀세는 두 가지의 국가기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억압적 국가기구이고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다. 억압적 국가기구 군대나 감옥처럼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며 현 체재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현 체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교육과 미디어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트린다. 일단 이데올로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어 가치관의 일부분이 되고 나면, 설령 그것이 아주 새빨간 거짓말이어도 좀처럼 그 사실을 눈치채기가 힘들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예시로 근대 한국에서 행해지던 반공교육을 들 수 있겠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국민학교에서는 이제 막 한글을 뗀 어린아이들이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만들기 대회’, ‘반공 웅변대회’ 따위에 참여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이 여과 없이 담긴 반공 만화와 영화가 방송되었다. 그 당시 아이들이 보는 방송에서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장면은 모두 검열되곤 했지만, 공산당이 얼마나 악독한 존재인지 알리기 위해서라면 검열에 예외가 적용되었다. 이렇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흡수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공산당이란 극악무도한 악마이고 남한은 북한과 달리 완벽하게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라고, 그리고 공산주의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처단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 기성세대가 된 지금, 그들 중 다수가 세상 모든 것을 ‘공산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닌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분류하고 전자처럼 보이는 것을 (가령 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 등을)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노동시간을 늘리고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같은 기득권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능력이 없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 나타나는 인도네시아의 반공교육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학살자 안와르는 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던 반공 영화에 대해 설명한다. 정부에 의해 제작된 그 영상물은 공산당이 사람을 무참히 학살하는 잔인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국의 모든 어린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의무적으로 극장에 가서 그 영상을 지속적으로 시청하고 또 시청해야 했다는 것이다. 영상이 워낙 끔찍해서 그것을 보고 밤잠을 설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와르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그 영상에 나오는 바로 그 잔인한 공산당들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노라고, 그리고 자신이 더 잔인했기 때문에 뿌듯했노라고 자랑스레 고백한다. 그리고 이렇게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흡수한 어린이들이 안와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을 반공 영웅으로 추앙하는 어른으로 자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알튀세가 주장한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둘 다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학살의 명분이 된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기 위한 공영방송 토크쇼와 반공 영화 등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예시이다. 한 편, 판차실라 청년회 등 조직을 동원하여 행해진 학살과 폭력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예시일 것이다. 이런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폭력이 존재하는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국민들은 무력하거나 겁에 질려있다. 판차실라 청년회 조직원들이 상인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장면에서 상인들은 돈을 뺏기는 와중에도 카메라를 보며 어색하게나마 미소 짓기를 멈추지 않는다. 대학살 재연 영화 촬영을 위해 동원된 한 인도네시아 남성은 어린 시절 가족이 공산당으로 몰려 살해당했고 그 후로 자신은 학교도 전혀 다니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이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를 위해서 말하는 것일 뿐, 그 사건은 이제 전혀 개의치 않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자꾸만 강조한다. 어째서 체재를 거부하지 않냐고, 고통의 경험을 용감하게 가시화하지 않냐고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학살에 대한 어떠한 공개적인 사과나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아무도 학살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 기득권이 국제사회에 결코 드러내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23년 1월 13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최초로 학살 사건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구체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할지 밝히지 않았다는 점과 ‘사과’가 아니라 ‘유감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 부족한 첫 발걸음이나마 떼기까지 <액트 오브 킬링>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미디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역할을 하며 기득권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게 기득권이 감추려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액트 오브 킬링> 이후에도 학살 피해자의 입장을 담은 <침묵의 시선>을 촬영해 인도네시아 학살 사건을 다시 한번 고발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월호 사건을 다룬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을 감상하고 극찬하는 등 사회 참여적인 행보를 이어 나갔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묻는 기자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란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거짓말의 틈에 균열을 일으킬 쐐기를 박는 것이다"1)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쐐기가 앞으로도 또 다른 거대한 거짓말들에 균열을 일으키기를, 그리고 쐐기를 박는 감독들이 세계 곳곳에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 송경원, "[조슈아 오펜하이머] '내게 영화는 거대한 거짓말의 틈에 균열을 일으킬 쐐기를 박는 작업'", 2015.9.9,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16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