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뒤끝에 푹푹 찌는 도심 속 무더위. 마침 소나기가 한차례 내려서 시원하게 식혀 주었습니다. 그 덕에 빡빡했던 제 눈도 인공눈물 한 방울을 넣은 듯 촉촉하고 부드럽게 편안해 졌어요.
한산했던 서울 시청 앞 덕수궁 주변은 다시 북적북적해졌고, 여러 나라 언어들이 뒤엉키면서 즐겁고 설레며 신나는 표정들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습니다. 또 여름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학생들이 단체 입장을 기다리며 까르르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모습들이 사랑스럽고 귀여웠어요. 발갛게 열기나는 얼굴에 밝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은 그날따라 참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사이 친구가 도착해 드디어 우리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갔어요. 큰 대한문을 사이에 두고 도심에서 자연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그때, 시청과 광화문부근에서 일하던 시절, 점심식사후 잠깐이라도 덕수궁 산책을 즐기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지금도 그때의 여유로움이 고맙게 느껴졌어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색과 온도를 마음껏 느끼고 맞이할 수 있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눈과 마음의 피로감을 위로해 주고 달래 주었던 고마운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금천교를 지나 우리의 목적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향하기 전에 등나무 그늘이 좋은 벤치에 친구와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야말로 푸르르고 바람도 솔솔 불어오면서 시원한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그 앞에선 아까 봤던 학생들이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어요. 과거 우리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 한참 웃었죠. 그때 친구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와~ 우리도 정말 오랜만이다. 이제 눈은 괜찮아?",
"어~ 얼마 전에 수술 3개월 이후 정기 검진받으러 병원에 다녀왔어, 다행히 잘 회복되고 있데..."
"그래 정말 다행이다. 어느 쪽 눈이었어?"
"오른쪽..." 친구는 유심히 제 눈을 살피더니,
"안경을 쓴 거 외엔 별로 티가 안 나는데?"라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 2주 동안은 저도 제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느 날 아침, 오른쪽 눈이 살짝 따가웠어요.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며 여느 때처럼 인공눈물을 양쪽 눈에 넣어줬습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엔 오른쪽 눈의 반 정도가 커튼이 쳐진 거처럼 가려진 느낌이 들었어요. ‘어제 클렌징 하면서 눈에 뭐가 들어갔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점심미팅이 끝날 때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불안한 마음에 근처 안과를 찾았고, 기본 검사부터 안구건조증 검사 그리고 망막검사까지 하고 나서야 망막 박리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도 잠깐, 당장 떨어지는 망막을 붙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왜? 갑자기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친절한 설명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의사 선생님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환자분 정리 차리세요~ 제 말 들리세요? 당장 수술 안 하면 실명할 수도 있어요. 예전 같으면 협업 돼 있는 종합병원으로 바로 연계해 드리는데, 아시다시피 지금은 의료파업 중이라 응급으로 종합병원에 들어가도 수술할 의사가 없어요. 바로 수술할 수 있는 병원과 의사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나왔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원하시면 수술 가능한 개인 병원과 선생님을 추천해 드릴 게요, 수술 의뢰 소견서 써드릴 테니 밖에서 잠시 대기해 주세요.”
집에 와서야 검색을 해보니, 망막 박리는 말 그대로 망막이 안구 내벽으로부터 떨어져 뜨게 되는 질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각막과 수정체 마지막에 망막을 거쳐 인지하게 되는데, 여러가지 원인 중에 저처럼 고도근시인 경우 안구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망막이 얇아지고, 찢어지거나 떨어질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하네요. 그래서 시력저하와 시야장애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신사동에 수술 가능한 병원을 찾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응급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소개받은 의사 선생님은 정말 유능한 분이셨고, 현재 저의 눈 상태에 대해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해 주셔서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 전이라서 다행이라는 말까지 들으니 전날 밤 실명이 될까 봐서 불안했던 마음이 수그러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눈만 부분마취를 한 상태로 수술대 위에 오르는 건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분마취가 너무 무서워 종합병원에서 전신마취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됐어요. 왼쪽 눈은 감긴 상태로 가려지고, 오른쪽 눈은 떠있는 상태로 최대한 고정돼서, 그 순간 저의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저의 머리에 손을 대시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씀해 주셨어요.
“OOO환자분, 저는 이 수술을 그동안 많이 해왔고, 안전하게 수술 잘되실 겁니다. 저를 믿고, 환자분 눈 속을 맘껏 구경해 보세요.” 그제서야 저의 심박수가 서서히 내려갔고, ‘그래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수술이 잘될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 아빠께 간절히 기도해야지~’
“네, OOO 환자분 잘 하고 계십니다. 그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다만 수술이후 망막이 잘 붙어있게 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엎드려서 자야 했어요. 2주간은 정말 매일매일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힘겨웠습니다. 또 모든 일정을 연기하거나 취소한 상태라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도 커졌어요. ‘몸이 천냥이면 눈은 900냥…'이라고 그만큼이나 중요한데, 눈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동안 너무 혹사시킨 건 아닌지?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저의 눈에게 그리고 마음에 이르기까지 여유의 숨구멍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어요.
덕수궁 대한문을 들어서며 안과 밖의 다름을 인지했듯이 이제는 저의 몸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등나무 그늘은 평화롭고 시원한 분수의 향연이 아름다운 가운데, 친구와 이런 저런 근황을 잘 나누고 우리의 목적지인 미술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어요. 건강하게 회복되어 가는 두 눈으로 섬세하고 고풍스러운 한국 근현대 자수전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고마움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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