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생활 초보백서 1-3
수염이 덥수룩하고 키가 장대같이 큰 터키 남자가 팀홀튼 커피를 내밀었어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미소가 아주 다정히 나를 향하는데 그저 당황스러웠죠. 오후 클럽 활동 시간에 대화 친구를 하자며 다가오는 모습이 참 어색하면서 능숙했어요.
나한테 관심이 있나 하는 쉬운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할 만큼 갑작스러운 접근이라 어버버 입을 달싹이며 내미는 커피를 거절했어요. 그 와중에도 외국에서 출처를 모르는 음료는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라는 걸 떠올렸거든요. 대화 파트너가 되어버린 그 남자와 몇 마디를 나눠보니 나와 비슷한 겨우 20대 초중반의 나이였어요. 뭐?! 예의도 없이 놀라고 말았어요. 한국에서 보던 남자의 얼굴과 너무 달라 상상하지도 못했던 탓이었죠. 호탕하게 웃은 그 애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너 10대는 아니지?
놀라 벌어진 입을 순식간에 턱 다물었어요. 실실 흐르듯 웃는 저 입매가 내 머릿속에 위험경고를 울려대기 시작했거든요. 삐용삐용 이러다 영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인생을 배우게 생겼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갔어요.
토론토의 모든 어학원에는 한국인이 많아요. 그 주위 식당이나 카페를 가면 어디서든 한국인을 찾을 수 있어요. 저는 심지어 아빠 친구 아들, 그것도 같은 유치원까지 나왔던 오빠가 같은 어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학원 스케줄이 모두 끝나면 그 오빠가 다른 한국 남자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는 곳을 알고 있었어요. 곧장 거기로 달리듯 걸어갔죠.
오빠!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날 의아하게 바라보던 오빠는 곧장 알아챘어요. 야 이리 와. 무슨 일인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나를 무리 사이로 끌어당겨 따라오던 터키 남자로부터 내 몸을 숨겨버렸어요. 제 키가 큰 편이거든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살짝 굽혀가며 머릿통을 낮췄더라고요. 얼마나 놀랬던지 10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나네요.
밤 10시쯤이었나, 친구들과 영어로 한참 수다를 떨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아파트까지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아직 불이 켜진 가게가 몇 있고 큰 교회도 있는 곳이었죠. 그 정도면 제법 안전한 곳이었어요. 24시간 영업하는 팀홀튼이 저 앞에 보이길래 이제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며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넜죠.
횡단보도와 같은 방향으로 직진하던 차량이 내 앞쪽에 멈췄어요. 창문이 내려가고 조수석의 어떤 남자가 몸을 내밀었어요. 헤이! 왔썹! 그 인사를 왜 받아주겠어요? 발걸음을 더 빨리 해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죠. 내가 반응이 없자 그 남자는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어요. 차는 천천히 내 걸음을 따라 이동했어요.
두 유 니드 어 맨?! 아이 해브 썸!
날 향해 지폐를 흔들었어요. 그들이 내려 다가올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팀홀튼으로 들어가야 하나 수백 번 고민했죠. 그때 순찰을 돌던 경찰차가 팀홀튼 앞에 서고 경찰들이 내려 팀홀튼으로 들어갔어요. 내 상황을 발견하고 선 게 아니라 도넛과 커피를 사기 위해 선거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큰소리로 웃던 그들은 곧장 도망치듯 차를 몰고 떠났어요.
등록한 모든 수업의 끝자락에 다달았을쯤, 유학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였어요.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죠. 그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한인술집이었어요. 소주와 한국 안주를 파는 곳이라 한국이 그리울 때면 늘 그곳으로 향했죠. 술에 적신 시답잖은 농담과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고개를 까닥이며 웃었어요. 그러다 보면 좁은 가게 안의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레 시선을 부딪치게 돼요. 당연히 금세 사라지는 찰나지만 이 날의 누군가는 달랐나 봐요.
지하에 있는 화장실을 갔다 나오니 계단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어요.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두세 테이블 떨어진 내게까지 들리던 무리 중 한 명이었죠. 분명 영어로 대화하던 것 같은데 내겐 한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아주 흔한 작업멘트를 날리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전화번호가 없다고 했어요. (당연히 거짓말이죠.) 그러자 그 남자는 카톡이라도 알려달래요. 나는 핸드폰이 고장 나서 지금 아이디를 기억해 낼 수 없다고 하며 자리를 피했어요. 마침 낮에 비를 맞았던 핸드폰을 정말로 꺼놨거든요.
그 당시의 저는 소주를 마신 날에는 꼭 초콜릿을 사 먹었어요. 그날도 예외 없이 가게 맞은편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킨더 초콜릿을 샀죠. 세상에 그 남자가 술집 앞에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이때부터 무섭다 느꼈던 것 같아요. 주머니에 손을 꼽아 놓고 서 있던 그 남자는 내가 스쳐 지나가려 하자 내 팔뚝을 잡았어요.
너 한국 간다는 거 거짓말이지?
연애 경험이 겨우 한 번이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나보다 커다란 남자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낯설고 거기서 벗어나 본 적도 없었거든요.
영어 잘해? 나 시민권자야. 내가 영어 가르쳐 줄게.
같은 한국인들끼리 어쩜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요. 지구 반바퀴를 돌아 사는 작은 세상에서 벌인 일은 절대 지구 반바퀴를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한국인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는 흥분된 대화 속에서 늘 나오던 말이었어요.
4개월을 살았던 아파트를 나와 새로운 룸렌트로 이사를 갔어요. 유학을 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수업을 듣는 두 달을 살기 위해 찾아 들어갔던 그곳은 하우스 일층과 지하를 개조해 학생들에게 세를 내 준 하우스였어요. 그곳에 갈 때쯤 한국인 남자친구가 생겼죠. 나보다 한살이 많고, 원래 어울리던 사람들과도 친한 것으로 신원보증이 됐다고 생각한 남자였어요. 요즘 유명한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속 배경이기도 한 제주도 사람이었어요.
그 남자와의 연애는 하필 내게 "첫"이 많았어요. 처음 가는 토론토 피크닉. 처음 먹어보는 푸틴. 처음 걸어보는 유명한 길, 처음 가보는 영화관. 영어공부를 할 때면 같이 지문을 읽어보고 문제를 풀고 대화를 했어요. 어렵고 재미없기만 했던 상급 스피킹이 정말 빠른 속도로 좋아졌죠. 자꾸만 내가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듯이 대해줬어요. 그래서일까요, 걔가 맞고 내가 틀린 게 많아졌어요.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조곤조곤 설명할 때면 그래 내가 잘못했나 보다. 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죠.
당연한 것이라며 제멋대로 만들어왔던 데이트 통장에 점점 돈을 넣지 않는 그 애를 보채지 않았어요. 친구와 더블데이트를 하다 갑작스레 치킨집으로 가는 길에, 길거리 6불 소시지는 혼자 턱 사 먹었으면서, 비싸서 안 시키겠다는 치킨을 내가 내 돈으로 내겠다는 걸 못하게 했어요. 돈 아까운 줄 모른다고요.
그러다 그 남자는 나의 의견을 묵살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을 반복하기 시작했어요. 마냥 그가 좋았던 저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은근히 눈을 감아주었죠. 아, 물론 범죄 행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결과로 나는 그 자그마한 방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했어요. 주인 할머니에게 모진 말을 듣고 모진 짓을 당하고 모진 손길을 받으며 내 발로 걸어 나왔어요. 내 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누군가에게도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일을 정실하고 무책임한 나와 무심하고 무책임한 남자친구가 만들어 홀로 무력한 내가 모두 뒤집어썼죠.
지구 반바퀴를 돌아 사는 작은 세상에서 벌인 일은 절대 지구 반바퀴를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그 집이 있던 역을 지나갈 때마다 귀를 막고 무르팍에 머리를 파묻으며 내가 고통 속에 빠져드는 와중에 제주도로 돌아간 그 애는 저와 헤어지고 곧장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토론토로 돌아왔대요. 결혼을 하겠다고. 당장 하룻밤을 잘 곳이 없어 애원했던 나를 외면했던 자기 누나의 집 거실에 들어가 같이 살고 있다고, 또 다른 무심한 남자인 친구가 내게 정보를 주고 있다는 것 마냥 떠들어댔죠.
외국에서의 연애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요. 안타깝지만 기본적인 책임감이 한국에서의 연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없어요. 물론 좋은 사람도 많지만 헤어진다는 다른 몇 커플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외국인을 잘못 만나는 것도, 같이 영어 공부를 할 한국인 남자친구를 잘못 만나는 것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끌고 오기도 해요.
그렇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가 있을까요? 타지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어린 어른 아이를 진심으로 달래줄 의외의 사람이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