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아닐걸

캐나다 학생비자로 미대에서 살아남기 2-3

by 정하서


언제 고향을 떠났다는 걸 느껴요?




사실 인종차별을 구별하긴 쉽지 않아요. 쉽게 구별할 수 없도록 고도의 말 돌리기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냥 나를 싫어하는구나 하고 잊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편이죠. 만약 학교에서 직접적인 인종차별이 일어났고, 그 사실이 학교 밖으로 흘러 나가는 순간 온갖 매스컴을 달굴 수도 있어요. 은근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또 그런 뉴스를 보면서 욕을 할 테니 참 역설적이죠.


자잘한 사건들은 기억할 가치도 없어요. 자기가 인종차별적인 질문이나 몸짓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거든요. 넌 어느 나라에서 왔니? 그 간단한 질문조차 실례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이민자들의 나라이니까요.


"이러저러한 걸 표현한 거지? 그게 잘 느껴지진 않아."


과제 발표를 마친 뒤 교수님이 제게 해준 피드백이었어요. 단 한 줄의 피드백과 굳은 표정. 더 이상 말할 게 없다는 것처럼 돌려버린 시선. 그 수업은 3학년 전공 수업이었고 열심히 하는 학생, 게으른 학생, 수업에 오지 않는 학생, 왜 오는지 모르겠는 학생 등 다양한 학생들이 모인 수업이었어요. 40 중반을 넘겼을 것 같은 교수님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분이셨는데 제법 유명한 책의 저자이기도 하고, 매해 펀딩을 받아 전시도 하는 유명한 분이셨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시는 학생작으로 모두 이루어지는 전시인데, 작품으로 인해 파생되는 긍정적인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지도교수인 그분에게 쏠렸어요. 하지만 교수님 이름이 적힌 책에 제 작품이 올라가길 바라는 학생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인기가 좋은 수업이었죠. 본인의 이름이 작게 적힐 뿐, 그 작품이 직접 전시되는 전시장의 초대권조차 받질 못하는 사실 따위를 부당하다 느끼기엔 다들 너무 어렸어요.


"다음."


넥스트! 를 외치는 교수님에게 다급히 물었어요. 조금 더 피드백해 달라고요. 나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표현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교수님은 또 똑같이 대답했어요. 나는 모르겠어.


정말 엉망진창으로 해 와 놓고 설명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학생들이 몇 있었거든요, 그 친구들이 발표할 때의 교수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이렇게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노력해야 한다. 이런 걸 찾아봐라. 저 학생과 대화해 봐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 때문에 화가 날 법도 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피드백을 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나는, 나는요?


친구들에게 물어봤죠. 저 교수님이 날 싫어하는 걸까? 대답이 어땠을 것 같아요? 아마도 맞아 혹은 아니야. 하지만 대답은 아직 모르겠어 였어요. 아직은 모르겠는 애매한 그 선, 분명히 느껴지는 이 적대감이 단지 내 작품을 싫어하는 것인지 나를 싫어하는 것인지, 혹은 날 차별하는 것인지 판단하기엔 시기가 일렀어요.


마지막 수업 날, 마지막 발표가 있던 날에 또 한 번 같은 일이 일어난 거예요. 물론 그 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어요. 메일로 약속을 잡고 찾아간 개인 피드백 시간에도 같은 적대감을 느꼈던 일이나, 메일 답장이 성의 없었던 일 등이죠. 그리고 학생 포털에 점수가 떴어요. 32점, D-. F를 겨우 면한 점수였죠. 출석만 하고 엉망진창인 제출만 했다고 해도 그 점수는 안 나와요.


방법을 강구하다 2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학장님에게 연락했어요. 이러저러한 일이 있고 정신적으로 힘들다 메일을 보내니 가장 빠른 일정으로 약속을 잡아주더라고요. 인자한 할아버지 학장님은 그다음 해에 은퇴가 예정되어 있는 명망 높은 교수님이었어요. 좁은 교수방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더듬거리며 다 먹혀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도 학장님은 기다려 주시고 들어 주셨죠. 32점을 받은 과제에 대해 설명해 보라 기회도 주셨어요. 그리고 그날, 한 학기 내내 기다렸던 피드백을 학장님께 들을 수 있었어요.


부당한 점수를 받았을 땐 학교 측에 항의 및 중재요청을 할 수 있었어요. 웃긴 건 학생이 5만 원을 내야 신청이 완료되고, 첫 번째 과정은 교수, 학생, 그리고 학교 측 직원의 사실관계 확인용 삼자대면이었죠. 아니, 이 교수님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다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요? 매번 마주할 때마다 주눅이 들 수밖에 없게끔 굳은 얼굴로 훑어보던 그 눈빛을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5만 원이요? 저 그때 돈 아끼느라 장 보는 것만 제외하고 일주일에 만원 쓰고 살았어요. 진짜예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학장님이 항의요청을 해보는 게 어떻냐 물으셨어요. 제 학생 포털에 들어가 지난 점수와 교과과정을 모두 살펴보셨거든요. 만약 이 학생이 과제를 잘못 이행했다 하더라도 32점은 말이 안 된다고, 저 교수가 절 평가하는 과정과 방식이 부당하다는 동의의 얻어 낸 거였어요. 그때 정확하게 알았죠. 나는 차별당한게 맞구나.


그 깨닮음조차도 저들과 같은 인종에게 확인받았다니.


더 웃긴게 뭔지 아세요? 학장님과 면담이 끝난 며칠 뒤에 저 교수에게서 뜬금없는 메일을 받았어요. 스크롤을 내려야 다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피드백이 가득 차 있더군요. 32점이 왜 타당한지까지 설명해놨어요!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나왔던것 같아요.




유학생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제가 어렸을 땐 유학은 떵떵거리는 부잣집 애들이나 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런 편인 친구들이 많긴 했죠. 제 상황은 좀 달랐어요. 한국에서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여유 있게 살다 외국에 나와보니 계급이 달라진 기분까지 들었다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죄책감이 있었어요. 적당히 여유 있게 살다 보면 좀 더 여유 부릴 수 있었을 부모님의 삶을 내가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봐 두려웠죠.


언어, 상황, 사람. 좌절의 순간도 참 많았고 성적표에 50점과 32점이 찍혀있긴 했지만 학생의 본분은 열심히 공부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멈추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대하는 부모님과, 오겠다고 고집부렸던 과거의 내 다짐, 그 시간들, 노력들, 비싼 등록금, 생활비.


그래서 돌보지 않았던 나의 향수병과 마음의 상처들.


전 절 지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매일 맥주 한 캔 씩을 마시고서야 잠에 들다가, 매주 꽃을 사다가, 집에서 운동을 하며 땀을 흘렸죠. 몸을 쉴 수 없게 했어요.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감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쉴 수 없도록, 그래서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고 감정이란 걸 느끼지 못하게 했죠. 과제를 하고 수업을 듣고 한인마트에서 캐셔로 일하며 돈을 벌었어요. 그 와중에 인턴쉽 자리를 구하려고 인터뷰도 보러 다녔죠. 감정을 돌보지 않으니 머리는 편했어요. 가슴이 편하지 않아도 몸이 힘드니 쉽게 잠들 수 있었죠.


외국에 나왔으니 그 값을 해내야 한다는 목표가 까만 선글라스처럼 늘 눈을 덮었어요. 사막에 사는 것도 아닌데 매 순간 불어닥치는 가벼운 모래더미에 숨이 막히니 오히려 겁이 없어지더라고요. 나를 혹사했던 생활들이 내가 마음먹은 것들을 이뤄냈어요. 무서운 성취감이죠. 성적이 계속 잘 나왔고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니 천 원짜리 베이글을 사 먹을 때 300원을 더 내 버터를 추가하게 됐어요. 문법이 맞든 틀리든, 말이 되든 안 되든, 그냥 말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어지기 시작했죠.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걸 이젠 알죠. 하지만 최선이었어요. 돌덩이 같은 가슴속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려면 계속 깔짝대고 나대야 했거든요. 내가 이방인이라고? 어쩌라고! 그런 자신감이 전부여야 했어요. 말을 못 알아들어서 매번 과제를 잘못해가던 학생에서, 수업과 과제 비평의 참여도가 가장 높은 학생이 되기까지 3년도 걸리지 않았죠.


유학생으로 살아남는 방법, 이제 그 진짜 비법을 풀어볼 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