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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l 05. 2024

나 혼자 산다, 아무 생각하지 않아요

루틴 대로, 앞머리는 지키면서

mbc '나 혼자 산다'에 본 항저우 아시안게임 역도 부문 금메달리스트 박혜정 선수의 훈련과정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기상, 운동, 식사, 잠이 한 세트이다. 한 세트를 마치면 다시 한 세트, 또다시 한 세트를 시작한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루틴대로 간다. 루틴 속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도 큰 틀에는 변함이 없다. 


샤워를 마친 박 선수가 거울 앞에 섰다. 체육관에 가기 전 앞머리를 헤어롤로 정성 들여 말고 샤방하게 화장을 한다. 기초부터 꼼꼼히. 준비 운동 몇 분에 땀이 비 오는 듯 흐른다. 봉긋했던 앞머리는 역기를 들어 올릴 때마다 힘없이 나부끼더니 이내 이마에 철썩 달라붙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정성 들여 화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박 선수는 기상, 운동, 식사를 하고 잠을 잘 것이며, 틈틈이 헤어롤로 앞머리를 말고 얼굴에 에센스를 방울방울 뿌릴 것이다.

엑스포츠 뉴스 

인터뷰 중, 그녀는 역기를 드는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긴장의 순간, 그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이 많아지면 자세가 흐트러지고,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는 학문하는 자세로 다문다독다상량[ 多聞多讀多商量 ]을 말했다. 학문을 하는데 많이 듣고,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하는 삼다(三多) 외에 무슨 방도가 있을까. 이후 삼다는 글쓰기로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오랜 지침으로 여겨져 왔다. 


글을 잘, 오래, 많이 쓰고 싶은 나는 약점이 참 많다. 그중 하나가 다상량(多商量)의 부재다. 보이는 것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는커녕 이치에 닿게 헤아리지 않고 오래 사유하지 않는다. 빗나간 생각은 안드로메다에 떨어져 처음 생각을 까맣게 잊곤 한다. 생각이 스타카토로 툭툭 끊긴다. 간신히 꼬리를 문 상상이나 공상은 깊은 사유로 확장되지 못하고 쪼그라든다. 나의 생각 창고는 늦겨울 곳간 마냥 썰렁하다.


박혜정 선수는 7년 넘게 역도를 했다. 내가 왜 이 무거운 걸 들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을 반복하는지 수천 번 수백 번 자문했을 터였다. 그런 그녀가 당연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몸소 얻은 깨달음이지 않을까. 역기를 들어 올리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짐했다면, 다른 생각은 필요 없다. 기상, 운동, 식사, 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날들이 소리 없이 쌓였다. 


결전의 날이 왔다. 그날도 숱한 그런 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기상을 하고 앞머리에 헤어롤을 봉긋하게 말고 에센스 몇 방울을 바르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달라진 환경에 흠칫 긴장했을까. 이내 평정심을 찾았겠지. 그랬겠지.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손에 탄산마그네슘을 바르고, 아무 생각 없이 자세를 잡고, 아무 생각 없이 기를 모으고, 아무 생각 없이 역기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숨을 참았다. 연한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날갯짓하던 새들도 가던 길을 멈췄다. 

연합뉴스

 박 선수가 눈앞에 있는 역기를 들어 올릴까. 아무도 모른다. 해봐야 안다.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 보다 1.5배나 무거운 역기를 번쩍 들었다. 팔을 쭉 펴고 하늘 높이. 지구를 들어 올리듯. 


아무 생각 없이 지킨 루틴이 그녀를 폭발시켰다. 자신의 가능성을 미루어 짐작했다면 실패했을지 모른다. 지켜보는 동료를, 수많은 카메라를,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심판과 응원하는 팬을 의식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녀는 오롯이 집중했다. 단순한 몰입이 고양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작은 글, 작고 작아 주머니에서 짤그랑거리는 구슬 같은 글이 아니라 나보다 큰 글을 쓰고 싶다. 뿌리 깊은, 옮겨 심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는, 나를 넘어서는 글을. 


기상, 밥, 쓰기, 잠을 쌓는 중이다. 끈기 없이 토막 난 생각은 이어 붙이고, 수시로 달아나는 생각은 닻에 단단히 고정할 참이다. 작은 바람에 요란하게 퍼덕이는 생각들, 그런 생각들을 그러모아 글을 쓰겠다.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른다. 해봐야 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밥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는 어느 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나보다 훌쩍 큰 글을 쓰며 아무 생각 없이 외칠 것이다. 으라차차!!!


#나혼자산다

#역도

#글쓰기

#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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