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 없다
이불 밖은 춥고 집 밖은 위험했다. 동네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되고, 갈 곳 모르고 떠다니는 유랑자가 되었다. 돌아올 길이 아득해 작아지는 집을 자꾸 되돌아봤다. 발걸음이 흔들렸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는 못했다.
한참을 걸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느긋했고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길바닥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하게 몸을 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낯선 거리를 헤매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꿈속에서 신발을 자주 잃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에서 우르르 몰려나갔다. 신발장에 놓인 신발주머니 안에 신발이 없었다. 텅 빈 신발주머니였다.
그날은 다행히 신발주머니 안에 신발이 들어 있었다. 그럼, 그래야지. 계단을 내려와 현관 앞에서 신발주머니를 거꾸로 쳐들었다. 흙모래 한 줌이 대리석 바닥 위를 흩뿌렸다. 텅 빈 신발주머니였다.
나는 운동화를 찾기 위해 학교를 뒤지기 시작했다. 일층 교무실에서 3층 6학년 교실까지. 화장실 뒤편과 운동장 구석구석까지 잰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나는 지쳤고 해는 저만치 기울었다. 하얀 실내화를 신고 교문을 통과해 집으로 갔다. 누군가 실내화를 신고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면, 얘야 그건 교실에서 신는 거란다, 신발을 잃어버린 모양이구나,라고 말할 것 같았다.
엄마는 새로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잃어버렸냐고, 신발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아무 데나 두니까 도둑이 네 것만 훔쳐가는 거라며 나무랄 것이었다. 교실 밖에서 신은 실내화는 지나치게 가볍고, 얇은 밑창은 길에 박힌 울퉁불퉁한 돌의 단단함과 흙의 질척임을 고스란히 전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녁을 준비 중인 엄마는 칼질을 멈추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니.”
나의 발자국 소리에서, 걸음과 걸음 사이의 틈에서 엄마는 나의 별 일을 예감했다. 예감은 벗어난 적 없고 내게 별 일은 자주 있었다. 하늘은 수시로 무너졌고, 캄캄한 그림자는 나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눈물도 흔하다. 정신 나게 빡빡 씻어.”
몇 시간째 머리에 이고 다닌 걱정과 불안이 엄마의 잔소리에 잘게 부서졌다. 나는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세수를 했다. 부엌에서 솔솔 풍기는 콩나물국 냄새가 허기를 툭 건드렸다. 유부가 들어있는 콩나물국이었다. 연갈색 유부가 콩나물과 마늘, 파를 넣고 끓인 콩나물국에 풍미를 더했다. 국물에 살짝 떠있는 기름과 유부의 쫄깃한 식감이 탕자의 귀환을 알렸다.
나는 콧물을 질질 흘리며 뜨거운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넉넉한 포만감이 몸을 나른하게 했고 헤매기를 멈춘 자의 안도감이 몸을 채웠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부드러운 양상추>의 야생 토끼가 떠올랐다. 어느 날 야생 토끼가 울타리가 둘러쳐진 누군가의 밭에 침입했다. 들판에 자란 풀이 아닌 사람이 재배한 양상추를 먹었다. 그 순간 야생 토끼는 이토록 부드러운 맛이라니, 그동안 내가 먹은 건 엉망이었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들판에 돋은 풀은 마르고 질기다. 강인하고 튼튼한 이를 가진 야생 토끼에게 야생의 풀은 문제가 아니다. 밤새 비가 내려 대지를 흠뻑 적시지 않는다면 야생 토끼가 거친 풀을 먹는 건 당연했다. 지친 어느 하루, 푸딩처럼 부드러운 양상추를 먹은 야생 토끼는 그 맛을 음미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을 테다.
집을 벗어난 내게 세상은 야생의 맛이었다. 늘 무언가를 잃어버려 주머니와 가방은 가벼웠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는 무거웠다. 하루를 살고 돌아온 집에서 먹은 밥과 유부가 들어간 콩나물국은 안온해 어린아이의 불안을 토닥이고 곤한 잠을 불렀다.
#신발 #꿈 #기억과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