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웃이고 당신은 배고플지 모른다

몰레 소스 치킨과 스웨덴 디저트 셈라

by 미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 가까운 이웃은 물론 관리실이나 경비실에도 떡을 돌린다. 내부수리로 소음을 일으켰거나 이사하는 동안 승강기 이용에 불편을 끼친 것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고, 낯선 동네에 왔으니 잘 부탁한다는 것도 인사일 수도 있으며, 어린아이가 일으킬지 모를 층간 소음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괜찮은 전통이라는 생각에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오토는 화가 났다. 다 싫고. 다 못 마땅하다. 한마디로 죽고 싶다. 실행력까지 좋은 오토는 죽기로 결심한다. 물론 세금 따위를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세금 완납. 전기와 수도를 끊고, 목을 매달 밧줄도 샀다. 죽은 뒤 거실 바닥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 카펫 위에 비닐도 꼼꼼히 깔았다. 완벽하다. 죽기만 하면 된다.


그는 죽었을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밧줄에 목을 매려던 순간, 창너머로 누군가 인도에 주차하려는 모습을 봤다. 세상에, 분노한 오토가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

여기 주차하면 안 됩니다.


재도전이다. 오토는 마음을 가다듬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올가미에 목을 밀어 넣으려는 찰나, 이웃집 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제발 그냥 가. 그녀는 두드렸다, 계속.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문을 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여자가 오토에게 음식을 내밀었다. 몰레소스 치킨이다. 우리는 이웃이고, 당신은 지금 배고플지 모른다며 미소를 건넸다. 오토는 마지못해 치킨을 받아 들고 문을 쾅 닫았다. 손끝은 따뜻했고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났다. 한 입 먹었다. 기적 같은 맛이었다. 오토는 코를 박고 몰레소스 치킨을 먹어치웠다. 오토는 재도전에 실패했다.


추위에 떠는 고양이도, 제 앞가림 못하는 이웃 여자도 거슬렸다.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들이었다. 문제들을 해결해야 속 시원하게 죽을 수 있다. 그는 고양이의 임시 집사가 되었고 면허가 없어 꼼짝 못 하는 이웃 여자에게는 운전 연수를 시작했다.


불친절한 지적질을 견뎌내느라 지친 이웃 여자에게 스웨덴 디저트 ‘셈라(semla)’를 사줬다. 살포레스, 밀가루, 버터, 치아시드, 아몬드 페이스트를 섞어 만든 빵 사이에 휘핑크림을 듬뿍 채운 디저트다. 긴장한 채 운전대를 잡았던 여자는 셈라를 한입 물고서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오토의 죽음은 그렇게 조금씩 미뤄줬다.

며칠 전, 영상에서 장수마을 어르신들의 일상을 보았다. 94세 한봉임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이웃집이나 마을회관으로 마실을 나섰다. 제철 재료로 장만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집에 있으믄 뭐 해. 하루 죙일 오줌 싼 강아지 혼낼 때나 입을 떼지. 여기 오면 형님, 동생, 동무들이랑 수다도 떨고 맛난 것도 묵고 좀 좋아."


우리 동네는 조용하다. 아래층 커플은 출근을 했고 옆 라인에는 누가 사는지 모른다. 1층에 사는 동대표는 단지 내 조경수를 심을 때나 분리수거할 때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힘들다. 남편 모르게 하는 일이 많아 저녁 시간이 되어야 집에 들어온다며 자신의 분주함을 말했다.


지인이 떡케이크를 보냈다. 나누어 먹고 싶은데, 해 질 녘 단지에는 아무도 없다. 길 고양이 둘만 텅 빈 길바닥에 몸을 길게 늘이고 있다. 잠시 후면 1층 동대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반듯이 자른 떡케이크를 갖다 드려야겠다. 우리는 이웃이고 당신은 지금 배고플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오베라는남자

#이웃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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