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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an 13. 2019

우울증 환자의 공부 방법

9가지 팁


 예전에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이 있어요.

 소위 '장수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1~2년 안에도 합격하는 시험을, 책을 다 외워도 외울 수 있는 시간인 10년이 걸려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왜일까요? 언뜻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시험에서 꼭 외워야 하는 책이 10권이라고 쳐도 매년 한권씩만 외워도 10년차에는 합격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수능시험도 10년간 준비해서 본다면 10년차에는 의대에 합격할 수 있어야 되는거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오히려 장수생일수록 합격에서 더 멀어지게 되는 경향도 있어요. 주위에서는 그 사람이 왜 합격하지 못하는지 잘 이해를 못해요. 그렇게 오래 공부했는데 왜 성적이 이렇게 낮아? 이렇게 생각하죠.


 제가 그런 케이스에요. 단순히 이 공부를 시작한 햇수로만 따지면 10년이 넘어가는데 저는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1) 책에 집중할 능력과 암기력이 사라졌다(우울, 불안이 장기화 되어 뇌가 망가져버린 느낌이에요), (2) 반복되는 실패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책 자체를 펴기도 힘들다,  (3) 설령 합격한다해도 이제와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자괴감이 수시로 몰려와서 숨이 막힌다.


 장수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속사정은 사실상 현역 수험생보다 못한거죠.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의 1/10 정도밖에 안되는데 트라우마는 크고, 숨쉴 때마다 몸안으로 들어오는 우울감과 불안감 때문에 공부는커녕 생존 자체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 정신적인 문제만이 아니에요. 하루종일 몸과 마음을 타격하는 우울감, 불안감이 몸도 여기저기 아프게 만들고 체력도 깎아먹고 피로하게 만들죠. 최근에 예전과 같은 격심한 불안을 경험했는데 그때 느낀 건 공부가 잘 되어서 하루에 2시간만 자는 것보다 불안감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만큼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몇배는 더 피로하고 힘들다는 거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붙들고 있으니 합격은 커녕 점수를 올리는 것조차 너무 힘들죠. 그리고 성적이 오르지 않고 희망도 보이지 않으니 우울감, 불안감은 한층 가중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오고, 시험은 점점 더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다는 사람을 데려다가 이런 우울감과 불안감을 주입한다면, 그 사람도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거에요.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렇듯 열악한 여건속에서 공부하는 모든 수험생분들을 응원하면서, 오늘은 저의 경험담과 노하우를 공유해보려고 해요. 작년 상반기부터 우울증에서 벗어났고 하반기에는 그동안 우울증때문에 망가졌던 능력들이 조금씩 돌아왔어요. 공부는 사실 가장 마지막까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이었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공부를 다시 잡는데 성공했어요.


 작년 10월부터는 단 하루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집중력은 안 좋더라도 최소 2시간 공부량은 매일 채웠어요. 11월부터는 하루에 6시간 정도 공부량을 채우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12월에는 매일 6시간 정도 공부가 가능해졌어요. 최근에는 제가 전성기 시절만큼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 제 기준에서는 지난 10년간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진 상황이고, 오랫동안 마비되어있던 다리가 움직여 다시 걷게 된 것만큼이나 큰 기적이에요.


 물론 이제와서 이렇게 공부가 잘 되어봤자 이미 다 끝난 게임이고 정상적인 상황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뒤쳐진게 사실이겠죠. 당장 목전의 시험에는 합격하기 어려울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자체가 저한테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생각외로 굉장히 크네요. 이제 우울과 불안의 늪에 다시 빠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설령 다시 빠지더라도 내 힘으로 헤어나올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나의 힘과 능력으로 앞날을 바꿔나갈 수도 있을 거라는 그 희망의 느낌이 정말 커요. 저는 우울, 불안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유가 저에게는 더이상 아무것도 할 힘도 능력도 없다는 거였거든요.


 산채로 썩어있는 사람같았어요. 뭘 할 수 있어야 우울속에서도 빠져나오고 반쯤 망한 인생도 바꿔나가며 '미래'라는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텐데... 아무것도 할 힘이 없다는게 너무 절망스럽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공부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하고 나니 이제는 저에 대한 믿음이 생겼어요. 제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패하더라도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못해서 한 패배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했는데 여기까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패배일 것 같아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오랜 무기력에 시달렸던 분들은 이해하시겠죠...


 그러니 이미 다 끝난 마라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완주하고 시상식도 끝내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버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나 혼자라도 결승선까지 뛰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기 위해서.




0. 우울증 치료하기


 일단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일이에요. 지금 살고 싶지 않은 상태라면, 살고 싶고 살아있는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는 공부를 버리는게 차라리 나아요. 총 수험기간이 3년이라면, 3년 내내 우울과 불안으로 거지같은 집중력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1년쯤 우울증 치료를 위해 던져버리고 남은 2년 동안 집중하는게 훨씬 효율적이겠죠. 하루 3~4시간 이상 꾸준히 공부가 가능한 경우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우울증 치료에 먼저 집중하세요. 올해 시험이 있다고 해도 버리고 내년 시험을 생각하세요. 당장 눈앞의 1시간이 아쉬워서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미룬다면 우울, 불안이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 시험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아져요.


 그리고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중이라도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우울증 치료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어요. 휴대폰 들여다보거나 컴퓨터를 하는 등 딴짓을 하는 시간이 못해도 1시간은 되지 않나요? 저도 예전에는 공부해야 하니까 시간이 없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결국 공부는 1도 못하고 휴대폰만 5시간 넘게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좋아서 들여다보는게 아니라 불안해서 중독되어 있었던 거에요. 불안감이 낮아지지 않으면 그 패턴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그걸 깨닫고 작년 상반기에는 아예 공부를 놨어요.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든 안하든 저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우울증 치료를 위해 필요한 일들, 놀이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그 시간에 휴대폰을 하고 있었을 거에요 그럴 바에는 아예 다 버리고 놀러다니는게 낫죠.


 하루에 1시간도 집중하지 못한다면 아예 공부는 버리는게 낫고, 3~4시간 정도 집중할 수 있다면 나머지 시간에는 운동이든 취미활동이든 하루 1~2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분명한건 우울증이 낫기만 하면 우울증 기간 중에 1달이 걸려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이틀만에 해낼수도 있다는 거에요. 우울증 치료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빨리 회복되는게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우울증이 단기간에 낫는 병이 아니잖아요... 그럼 우울증이 나을 때까지 아무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나요? 시험은 포기하나요? 이런 질문도 하실 수 있겠죠.


 저는 더 잃을게 없는 상황이라 선택이 쉬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뭘 하든 그 시간동안 제가 어차피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미 공부든 뭐든 손을 놓아버린채로 몇년간 살아왔는데 여기서 몇년 더 놓아버리는게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을 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까요. 우울증으로 10년을 날린 사람에게는 1~2년 더 날리는게 별로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남은 인생 내내 우울증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게 될 거라는걸 아니까요. 그러다가 고통이 너무 극심해지면 자살로 삶을 마감해버리게 될 거라는걸 아니까요.


 하지만 잃을게 있는 상황이라면 쉬운 선택은 아니겠죠. 보통 1년 단위로 이루어지는 수험생활에서 몇달은 꽤 크니까요. 다만 저도 처음부터 우울증으로 아예 아무것도 못했던 게 아니라 몇년에 걸쳐 더 악화되면서 무너진 경험에 비추어볼 때 초기나 중기쯤에 우울증 치료에 적극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게 필요하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은 해요. 그때 아까웠던 1~2시간이 나중에는 몇달, 몇년에 걸친 답없는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1. 시험을 준비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


 우울증에서 어느정도 회복되면, 평상시 마음이 불안감, 우울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가 돼요. 기억력, 집중력도 돌아와서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하고 싶지 않은 공부에 대해서는 아직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더라도. 머릿속이 맑고 개운해지고 정신이 명료해지죠. 우울, 불안이 급습해도 전처럼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좀 생겨요. 이때부터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때는 그동안 준비해왔던 시험을 계속 도전해볼지 아닐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어요.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공부가 힘든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이 시험에 도전해보고 싶은지'에요.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인생이 망한다거나, 이 시험에 합격해야만 남들보다 뒤쳐진 상황을 만회할 수 있다거나, 이 시험에 합격해야만 내 인생의 가치를 되찾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면 안하는게 나아요. 그런 생각으로 공부하다가 우울증이 온 거고, 우울증이 심해져서 죽을 뻔한 거잖아요. 그 생각을 고집하는 한 우울증은 낫지 않을거고 우울증이 낫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은 더 멀어지고 결국 언젠가는 그 생각이 우리의 목숨을 끊어놓을지도 모르죠. 그런 생각으로 시험을 준비하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시 우울과 불안에 무릎을 꿇게 될 거에요.


 그냥 내가 지금 이 시험을 보고 싶은지 딱 그 질문만 던져보세요. 도망가고 싶으면 그냥 도망가세요. 좀더 쉬운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게 낫겠다하면 다른 시험으로 바꿔볼수도 있겠죠. 이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자신에게 물어봤을 때, 답이 yes라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라도 돌진하는 거고 no라면 다른 길을 찾아야죠. 저는 이 질문을 몇달 정도 계속 던져봤는데 정확하게 확신할수는 없어도 대충 yes라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사실 저는 이 공부를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험에는 합격하고 싶어요. 저는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기간 중에 다른 일들을 해보면서 좋아하는 일을 좀 찾았어요. 그래서 이 시험에 합격해서 가질 수 있는 직업 자체에 대한 미련은 적은 상황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yes라고 대답했어요. 왜냐하면 시험에는 합격하고 싶었거든요. 우울증 때문에 무너진 이 상태대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라는 속담처럼, 우울증때문에 잃고 실패하기만 했던 이 길에서 다시 일어나서 제 힘으로 성취를 이뤄내고 싶어요. 너무 아팠던 기억들에게 내가 이렇게 나아서 너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이 공부를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그 자체, 점수를 올릴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제가 우울증에서 회복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겠죠.


 어떤 이유에서든 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걸 알게 되면 첫 걸음은 내딛은 거에요.

  


2.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기


 우울, 불안을 경험하는 환자들의 공부 방법은 일반 사람들의 공부방법과 좀 달라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공부를 해야 된다고 각오를 다질수록, 하루에 몇 시간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할수록, 이 문제집을 매일 얼마나 풀고 이 교과서를 몇 페이지를 봐야 한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수록, 이걸 다 암기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가질수록 불안감이 높아져서 실패하게 돼요. 그래서 이런 심리적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대충, 살살, 한번 시험삼아 해본다'는 마인드를 갖는게 중요해요.


 "나는 공부를 하는게 아니야. 공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웠고 어느날부터 공부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오늘 우울증 치료 차원에서 이 책을 30분만이라도 읽고 집에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암기한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그냥 읽었죠. 이렇게 어려운데, 이렇게 느린 속도로 해서 언제 시험에 합격하나... 이런 생각은 안했어요. 공부 자체가 우울증 치료라고 생각했어요. 암기하려고,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불안이 올라와서 머리가 굳어요. 할 수 있는 것도 못해요.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죠. 그런데 그냥 시간을 보낸다거나 우울증을 치료한다거나 하는 마인드로 가볍게 시작해서 한줄이라도 읽어보려고 하면 불안감이 자극되지 않아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돼요.


그렇게 조금씩 설렁설렁 하는게 의미없어 보이지만 그런게 2~3달 정도 쌓이니까 정식으로 공부를 할 힘이 생기더라고요. 이 공부에 관해서 머릿속에 회로를 깐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건드리는게 나중에는 큰 도움이 돼요. 그때 잠깐 하고 몇달간 다시 안 봤던 부분도 나중에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고요.  



3. 공부 계획 세우기


 앗... 방금전에 공부계획을 세우면 세울수록 불안해지니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우울증 환자에게는 일반적인 공부계획은 독이 되지만,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계획은 세울 필요가 있어요.


(1)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반드시 봐야 될 최소한도의 책을 정해놓기


 어떤 시험이든 합격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최소한의 내용들이 있죠. 우울증 환자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하루 10시간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험에 출제되는 A급 문제부터 E급 문제까지 전부 꼼꼼하게 공부할 시간과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시간 되는대로 다 공부해버리면 되겠죠.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달라요.


 우울증 환자는 우울, 불안으로 버릴수밖에 없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많아야 A급에서 B급 정도까지의 내용만 공부할 수 있어요. 그걸 빨리 인정하고 시험 합격을 위해 필요한 가장 최소한의 공부 내용이 담긴 교재를 골라놓으세요. 너무 내용이 적다거나 이것만 봐서는 좋은 점수를 못 받을 것 같다 싶은 마음에 더 두껍고 더 내용이 많은 책을 고르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에요.


 기출문제가 중요한 시험은 그 기출문제만 딱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세요. 교과서는 기출문제를 통해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보는게 나아요. 교과서를 메인으로 봐야되는 시험이라면 두꺼운 교과서 말고 최소한의 중요한 쟁점들만 축약해놓은 작은 교재와 인강으로 시작하는게 좋아요. 거기 있는 내용만 외워도 70%의 문제를 맞출 수 있는 정도의 책이면 괜찮아요.

 

 나중에 그 책을 충분히 마스터했다면 그때 더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책에서 C, D급 문제들을 추가로 공부하면 합격에 더 가까워지겠죠. 올해 시험에서는 A, B급 문제들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면 내년 시험에서는 나머지 쟁점들까지 추가로 공부해서 합격할 수 있겠죠.


 가장 중요한, 최소한의 책으로 공부를 시작하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필요한 회로가 머리에 깔리기 때문에 나중에는 공부가 쉬워져요. 우울증으로 많은 능력들을 잃은 상태에서는 그 회로를 빨리 만드는게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공부가 쉬워지는 경험을 해야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거든요.   

   

(2) 문제는 풀지 말고 읽기


 문제집을 공부할 때 답지를 보지 말고 자기 힘으로 풀라는 조언을 많이 하죠. 그게 보통 상태에서는 맞는 말이겠지만 우울, 불안으로 집중력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문제를 풀기가 어려워요. 문제집을 풀겠다고 생각하면 문제집을 아예 펼쳐보지도 않게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럴  때는 문제를 푸는데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답지를 그냥 책처럼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저는 공부를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처음에는 객관식 문제집의 정답 지문만 쭉 읽었어요. 처음에는 그것도 어려웠는데 그냥 눈에 바른다고 생각하고 이해가 되든 안되든 읽었어요. 정답 지문만 읽으면서 책 한권을 끝내고, 그 다음번에는 정답 지문을 복습할 겸 다시 한번 읽었어요. 그 다음에는 오답 지문들까지 읽고요. 그게 처음에는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걸 이해하려고 교과서를 읽을 집중력은 없었기 때문에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게 한달 정도 하니까 점점 지문 자체의 내용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익숙해져서 빨리 읽게 되다보니 성취감도 생겼어요. 처음에는 이해 못했던 지문들도 나중에는 이해하게 됐죠. 서술형 시험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집의 답을 읽는 방식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공부할 책과 방법 정도는 계획해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4. 시간 모으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공부 시간을 정해놓는게 좋은 것 같아요. (1) 하루에 5분을 하더라도 매일 공부하기, (2) 몇 시간 이상 공부하기 같은 규칙은 정해서 실천하는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하루에 3시간 공부하기 같은 규칙들을 정했는데 실패했어요. 아직 우울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 때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니까 우울감이 너무 심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새로운 가치관대로 지키지 못할 규칙은 없애버렸어요.


 대신 10시간씩 모으는 방법을 썼어요. 스탑워치를 하나 사서 카운트업해나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모았어요. 하루든 이틀이든 일주일이든 10시간을 채우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저는 종교가 있으니까 매주 시간을 봉헌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울증 환자인 제가 10시간 동안 공부를 했다는 건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10시간을 채울 때마다 언젠가 다이소에서 사왔던 별 모양 포스트잇에 '10시간 봉헌'이라고 써서 노트에 붙였어요. 통장 모양의 가계부같은 곳에 기록하거나 10시간을 채울 때마다 100원짜리동전을 저금통에 넣는 방식으로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10시간을 모으는데 열흘 넘게 걸렸어요. 하루에 평균 1시간도 안 되게 공부한거죠.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 10시간씩 모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10시간이 3일만에 모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어느새 80시간이 넘어갔죠. 10시간씩 모으는 방식이 좋았던건 하루 공부시간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에 1시간밖에 공부하지 못한 날도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덜했어요. 그러면서도 10시간을 다 채우면 그게 며칠이 걸렸든 뿌듯했고요. 이 시험 준비를 위해서 이만큼의 시간을 쌓아나가고 있다는게 마음의 안정감을 주기도 했어요.    

    



5. 집중력 앱 활용하기


 처음에는 집중하는게 너무 힘들었고 죽어도 공부가 안됐어요. 우울증에서 많이 회복된 상태에서도 집중만큼은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집중력에 관련된 앱을 찾다가 이 앱을 발견했어요. '마인드 위즈'라는 앱인데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는 주파수, 기능성 음악, 백색소음을 들을 수 있는 앱이에요. 데이터 없이 사용할 수 있고, 무료로 이용해도 충분했어요. 무료로 이용하면 15분 단위로 음악이 정지되는데 저는 오히려 그 이상 집중할 능력이 없으니 15분 단위로 끊어주는게 도움이 됐고요.


 8월에 반짝 공부가 됐다가 9월 한달은 우울, 불안이 재발해서 말아먹고 10월에 울면서 찾았던 앱이에요. 그때는 우울증이 많이 나아졌는데도 왜 집중을 못하는지 너무 힘들었어요. 성인 ADHD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하는 공부에 너무 안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공부 자체에 트라우마가 생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을 다했어요. 그러다 너무 절박해서 이 앱을 찾았고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많이 됐어요.


 플라시보 효과인지 그때 마음이 너무 절박해서 그랬는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주파수, 기능성 음악(클래식)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니까 집중에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이 앱을 이용하면서 집중이 잘 되는 경험을 몇번 했고, 그게 반복되면서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집중력이 더 늘었어요. 두달 좀 넘게는 하루종일 이어폰을 끼고 들었고 요즘은 이 앱을 잘 사용하진 않고 있어요. 앱에 관계없이 집중이 잘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앱에서 나오는 기능성 음악이 오히려 방해가 될 정도로 깊게 집중할 때가 있기도 해요. 아무튼 첫 두달 동안은 이 앱 없이는 살 수 없을만큼 매달려 있었어요. 집중력이 너무 없어서 힘들 때는 한번 시도해봐도 괜찮은 앱인 것 같아요. 특히 카페 공부할 때도 좋아요. 카페 음악때문에 집중이 안되지만 도서관에서는 숨막혀서 카페 분위기가 필요할 때, 이 앱을 이어폰으로 듣고 있으면 카페 음악이 묻혀서 집중도 잘 되고 좋더라고요. (참고로 앱 광고는 아니에요. 저는 이 앱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6. 아침에 30분 확보하기


 하루에 1시간 공부량을 채우는 것도 힘들던 때, 아침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기 전까지 30분만 공부해놓아도 하루 전체 공부량의 절반 정도를 채울 수 있잖아요. (음...?)


 공부시간을 더 늘리더라도 아침의 30분은 소중한 것 같아요. 아침에 30분 정도 공부를 한 날은 아무리 힘들어도 공부 시간을 채워나가는 쪽으로 진행이 되더라고요. 저는 아침에 도서관에서 자리 잡고 공부를 시작하는 그 자체가 너무 힘든 스타일이었는데 아침에 미리 공부를 좀 해두면 훨씬 나았어요. 그래서 비몽사몽간에 이불 속에서라도 책을 조금이라도 읽었어요.



7. 공부 블로그 쓰기


 인스타그램이든 블로그든 그날 그날의 공부 내용을 올릴 수 있는 SNS를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직접 해본건 아니고 얼마전에 이렇게 하시는 분 블로그를 보고 괜찮을 것 같아서 추천드리는 방법이에요. 저도 할 계획이 있고요.


 주위 사람들이 아는 계정은 부담스러우니 그냥 익명 계정을 하나 파서 거기에 매일 그날 공부한 책과 공부시간 같은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올리는 거에요.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사진은 1장 정도, 내용은 간략하게. 누구 보라고 올린다기보다는 생활을 기록할 겸,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겸 올려보는건데... 괜찮은 방법같아요.

 


8. 인터넷, 카톡 중독 등 문제


 저는 인터넷 등 중독 문제가 아직 좀 있어요. 작년 하반기에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죠. 하루중 공부 시간이 1이라면 휴대폰을 보는 시간이 9정도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중독을 해결하고 공부를 시작하겠다거나 공부를 시작하면 이런 중독을 끊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공부에만 에너지를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중독에 에너지를 할애하는 건 현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젠가 중독에는 이유가 있다고 쓰기도 했던 것처럼, 중독은 나의 현재 심리상태가 불안해서 그걸 가라앉히려고 나오는 현상이기 때문에 중독 그 자체를 고치려고 노력하는건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중독을 끊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하루에 10시간을 소비한다면, 공부량을 2나 3으로 늘리면 중독에 사용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8이나 7로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만일 휴대폰을 끊고 공부하겠다고 했다면 어차피 불안해서 휴대폰 외에 다른 딴짓으로 시간을 보냈을거고, 휴대폰도 못 끊는 인간이라고 자괴감도 너무 심했을거고, 휴대폰을 끊는 상황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공부가 더 싫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어차피 공부시간이 늘어나고 불안감이 줄어들면 중독도 자연히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버려뒀어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저도 아직 보완해나가야 할 것들이 많지만 당장 기나긴 무기력 상태에서 일어나는데 도움이 되었던 방법들을 적어봤어요.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 겪는 수험생활은 굉장히 힘들죠. 수험생활 자체가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요인인데 우울증을 치유하면서 수험생활까지 해낸다는 건 대단한 도전인 것 같아요. 필요없는 시험이라면 과감히 그만두는 것도 용기있고 인생에 도움되는 결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시험이라면 그걸 우울증 치료의 한 방법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참, 새해인사를 못드렸죠. 다들 행복한 새해되시고 올해는 원하시는 일들 많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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