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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고독력수프> Episode #28

by 오렌



재난경보와 두려움

독한 담 약을 먹고 졸고 있는데 재난경보가 울려서 깼다. 부산 지역에 강풍으로 피해가 예상된다고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강풍이라는 자연 현상 자체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강풍이라는 단어가 몰고 오는 기억과 감정과 감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쓰게 한다. 태풍이 불었던 날들, 그 불안했던 밤들, 암담했던 새벽들, 사무치게 두렵고, 막연하게 그리웠던 유령 같은 실체들, 그 때문에 일어나서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0년 전에도, 10년 후인 지금도. 그때보다 나아진 게 있다면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운 마음

며칠 전부터 딸이 '좋아하는 엔플라잉이 부산에 오는데 콘서트를 보러 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알아서 결정하겠지 싶어서 관여하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표를 예매하고 그간의 심경에 대해 털어놓았다. 야간 아르바이트 때문에 콘서트를 보러 가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서 주저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동안이나 주저한 원인이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직면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했다. 콘서트에 다녀와서 직캠 찍은 것을 보면서 컵라면을 먹고 2시간도 채 안되게 자고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엔플라잉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과 양자물리학

짝꿍 언니와 일하는 것이 도무지 안 맞아서 다른 짝으로 바꾸기 위한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와 오래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던 이 언니가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낄까 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어려워도 인정에 이끌려서 싫은 감정으로 일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언니가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이번 달로 퇴사를 한다며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짝이 되기를 바라는 언니의 짝도 그만두게 되어서 그간의 모든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이 되어버렸다. 내면의 고민과 노력의 태풍의 눈이 외부에서 발생한 기류와 만나서 새로운 난류를 형성하는 것 같았다. 이 현상에 대해 정토회를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나의 요정 친구와 대토론회를 가졌다. 마음에 대해, 불교에 대해, 양자물리학에 대해, 얕고 가벼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마음의 수준

달라이라마께서 대중 강연을 하시고 질문에 답변을 하시는 장면을 유심히 보면 '마음에는 여러 가지 다른 레벨이 있다'로 시작하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레벨, 수준, 그릇이 다 다르기 때문에 답도 다르다는 뜻이다. 해서 현자들은 묻지 않는 자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비슷하게 생기고 비슷하게 사는 것 같지만 저마다 보이지 않는 자폐 캡슐 속에 살고 있는 듯하다.



몸과 마음의 회복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잠을 자는 것의 효능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모든 힘을 다 썼다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쓰러지듯이 잠이 들고나서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깨어나는 아침은 신비 그 자체다. 지친 몸으로 잠으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허락된 가장 안전하고 은혜로운 선물이다. 한때 몇 시간 제대로 자지 못했을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충분히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잠은 작은 죽음이라고들 한다. 깸은 태어남이고. 그렇게 잠들고 깨어나는 하루의 사이클이 작은 인생이라고 말이다. 큰 인생의 죽음도 이와 같이 안전하고 은혜롭게 받아들이려면 깨어있는 인생의 시간을 충분히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일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둔갑하는 환상의 두려움을 직면하며. 나만의 자폐 캡슐을 맑고 투명하게 닦으며. 깊은 마음의 레벨에 도달하며.




Radiohead - High and Dry



로고5.jpg '혼자인 것이 슬프면 외로움이고, 혼자인 것이 즐거우면 고독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에 영감을 받아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운 고독을 연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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