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 드는 존재
<우리, 나이 드는 존재>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나이 듦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풀어놓은 에세이집이다. 책 소개를 보니 1985년생부터 1967년생까지 평균 나이 48세의 여성 작가들이 썼다고 한다.
읽어보니 어쩜 이렇게 생김새가 다르듯 나이 드는 방식도 다를까 신기할 따름이다. 나이 듦에 대한 어느 정도의 끙끙거림을 앓고 나면 그것을 받아들이며 저마다의 깨달음을 갖게 되는가 보다. 나도 그렇다. 한때는 나이 드는 게 징그럽게 싫더니 이제는 어차피 거슬러 오를 수 없다면 본래 가던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결단을 내렸다.
만약 당신이 시간의 파도를 넘어 더 오래 좋아하는 일을 하며, 더 길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면, 그렇다, 일어서라.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운동을 찾아라. 육체의 단련은 정신의 성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바다에서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자유가 깃들기를. 삶 속에서 새로이 배우는 그 기쁨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이가 들며 받아들인 가장 큰 건 ‘눕눕’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20대 내내 4시간 이상 자본 일이 별로 없었고, 30대 이후에는 조금 늘려 하루에 5~6시간 자며 살아왔다. 뭔가 개운치 않은 날엔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였고, 잠이 안 오면 그대로 일어나 책을 읽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많았다. ‘어차피 죽으면 내내 잘 텐데.’라는 미련한 생각이 나의 뼈대와 같았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를 어떻게 건너왔나 싶도록 잘 기억도 안 난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느끼던 상실함과 허무를 견딜 수 없었고 자신을 행주처럼 쥐어짜듯 괴롭혀서 그날의 성과를 만들어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나이 들어 혹여나 제 자리에서 밀려날까 두려움도 있었다. 지난 2년간은 살면서 가장 많이 병원에 드나든 시기였다. 상실과 자기혐오에 푹 절여져 있던 나는 의료인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나이 듦과 건강의 소중함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게 바로 ‘누워있기’다. 자는 건 거의 죄악이다시피 여겼지만, 몸이 피곤하고 나른하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내 몸의 허기진 부분을 채워 넣기. 그러다 눈이 감기면 짧게 잠들기도 한다. 살면서 낮잠은 독감과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잔 게 전부였는데, 건강을 되찾으면서는 낮잠의 신호도 소중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 내가 지금 피곤하구나.’
‘지금은 휴식이 필요하니 잠깐 하던 걸 손에서 내려놓을까?’
이렇게 받아들인다.
잠시 잠든 30분의 시간이, 잠깐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는 시간이 그다음에 해야 할 작업과 잡일을 뚝딱 해치우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 게다가 잠깐 낮잠 좀 잔다고, 게으르게 누워 핸드폰 좀 한다고 누가 내게 죄를 지었다고 호통칠 일도 없다. 그동안은 스스로 호통을 쳐왔을지언정, 나이 들어 피곤하고 노곤해져 버린 걸 어쩌란 말인가. 피곤함엔 범인이 없다.
그렇게 마흔 언저리를 건너와 이제 만으로 43살이다. 40대가 되면 세상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안 무너지는 걸 확인했으니 좀 더 편하게 살아볼 만하다. 그 시기를 지나 보니 50대에도 세상이 안 무너질 걸 미리 알았다. 나이 듦을 막을 수 없다면 그로 인한 변화를 인정하고 달라지는 나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것. 그런 나를 절대 미워하지 말 것. 오늘도 온몸으로 나이를 받아들이며 소파와 한 몸이 되어간다. 오늘도 눕눕!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이 계속 태어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세계가 꾸준히 사라진다. 쉽게 떠나보내기 싫어서 나는 사라짐의 지도를 그리고 사라짐의 사전을 만든다는 상상을 펼친다. 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생각난다. 어떻게 사라질지 내가 선택할 수도, 알 수도 없다. 다만 이 세상에 흔적을 새기고 살아가는 동안 안타깝게 사라지는 어떤 세계와 열심히 연결되고 싶을 뿐이며, 사라지기 직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을 뿐이다. 인생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끊기더라도 덜 추해 보이고 싶어서다. 지나간 시간을 뒤지고 다니는 듯한데 희한하게도 나는 계속 새로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