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피해자와 대화했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권성민

by 귀리밥

한때는 정치와 토론을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요새는 좀 지치는 느낌이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에 쾌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에너지가 증발한다. 대답하기도 싫어지고, 설득하는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진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걸까. 융통성을 소진했나.


그럼에도 1인 지구가 아니라서 다 같이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아들일 때도 그랬다. 무슨 얘길 하는지는 알겠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까?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의 경험과 깨달음 위주의 에세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부딪히고 소통하고 공존해야 할지 사회학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다.


'개식용 금지법'을 지지한 82.3퍼센트와 채식선택권 법제화에 동의한 38퍼센트 사이에는 설득과 이해관계, 감정의 정치가 놓여 있다.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인물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정된 자원과 충돌하는 감정 사이에서 의사결정이 필요해지는 순간, 갈등과 정치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리고 나는 이쪽이야말로 진짜 사회 속 갈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질문 앞에서 사람마다 멈추는 지점이 다르다. 내가 서있는 지점보다 앞에 선 사람은 진보적으로, 나보다 뒤에 선 사람은 보수적으로 보인다. 정치 성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대부분은 자신을 '중도'라고 말한다. 조금 더 양보하더라도 중도 보수, 중도 진보 등 중도는 빠지지 않는다. 모두가 중도다 내 왼쪽과 내 오른쪽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스펙트럼이 된다


SNS에서 매일 다른 수많은 댓글과 의견과 콘텐츠를 보게 된다. 오프라인으로 만나면 다 그렇게 떠들기 어려울 텐데 온라인에서는 세상 신랄하고 공격적이다. 공론장으로서의 SNS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론장에서 드러나는 정치의 역사와 역할을 분석하고 젠더 영역에 있어 양극화되는 입장을 풀어낸다. 특히 페미니즘의 반대로 이퀄리즘을 지목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한 시대인데 그 목적을 희석하는 이퀄리즘의 문제에서 다수의 비겁함을 되새겼다. 나는 ‘요즘 세상 좋아졌다’라는 말의 비겁함을 싫어한다.

이퀄리즘'은 "모든 생명이 다 중요하다"와 정확하게 같은 논리로 만들어진 조어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극복하고 성평등을 실현하자는 목소리 앞에서, '여성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다 극복해야 한다.'라고 외치며 문제의식을 희석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여성주의로 번역되는 페미니즘 대신, 평등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 '이퀄리즘'이란 단어를 가져다 놓는다. 이런 식이면 BLM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여성의 권리만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런 프레임 싸움은 정치 담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전술인 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내 얘기가 그게 아닌데!‘


끝으로 공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타협 혹은 계몽이 필요할 때 인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은 “그들은 피해자와 대화했다.”라고 끝난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사는 세상에서 대화라는 건 유토피아의 산물처럼 들리기도 한다. 누구든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데만 나를 소진할 수는 없다.


하마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일상에서 사람들은 논리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느껴지는 관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상대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더 큰 설득력을 갖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논리를 펼치느냐보다는 나의 마음과 경험을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 우리가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인간사에서 벗어나지 않고 적정한 공공선을 지키며 사는 게 인간이라는 단위로서 지켜야 하는 기본 전제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있다면 그래도 읽은 후의 내가 조금 더 담을 허물고 다른 입장을 들어줄 여백을 만드는 데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게 있다면 혐오하는 자의 입장을 들어줄 여백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반려동물 입장 허용제도와 관련해 수많은 기사와 댓글을 읽었다. "나도 애견인이지만", "나도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이라고 서두에 쿠션어를 붙인 뒤 이어지는 혐오의 댓글을 보면 '아, 역시 대화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하고 마음이 딱딱해지려 든다.


감히 개와 겸상할 수 없다며-보통 식당이나 카페에서 개는 뭘 먹지 않거나 집에서 싸온 간식 정도를 자기 자리에서 먹는다. 겸상 자체를 안 한다.


더럽게 털을 날리며-이중모 삼중모 강아지의 털이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그 털이 날지는 않는다 보통 견주옷에 묻어있는 정도다 오히려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진다 사람은 하루 평균 100개 이상의 모발이 빠진다


나는 개를 싫어하니까 개가 가게에 들어오는 것도 싫다며-그러면서 내가 애가 싫다고 노키즈존이 좋다고 하면 혐오라고 하겠지


감히 개를 애기라고 부르다니-반려가족이기에 그럴 수 있다. 동물을 인간 이하의 존재 혹은 애완으로 보는 사람일수록 동물학대와 유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혐오를 애둘러 드러내고 어차피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체념한다. 생명 혹은 가족을 생각하는 지점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면 결코 악인은 아닐거라 믿고 싶다. 여전히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고 믿고 싶다. 각자의 역사가 있어 각기 다른 곳에서 구부러진 인간들이 모여 구불거리는 곡선으로 서로를 다독여줄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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