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만들어간다는 건

탱크, 김희재

by 귀리밥

망에 빠진 사람에게 믿음이 발휘하는 힘이 어디까지인지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뼈대를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믿음이란 게 어떤 사실이나 타인과의 신뢰를 말할 수도 있고 절대적인 존재를 향한 경외감이기도 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겐 후자의 믿음이 큰 힘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전자가 더 크다고 생각은 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이끄는 이정표가 있어야 절대적인 존재도 상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글 속 탱크는 믿음을 갖게끔 만드는 사물이다. 해외에 여러 군데, 그리고 한국의 어느 시골 야산에 컨테이너를 놓고 ‘탱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 기도의 방식도 정해져 있지 않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보다 순수하게 간절함만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같은데, 탱크는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

루벤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 루벤을 따라가는 영경, 둡둡은 탱크의 기적을 믿는 사람, 도선은 의지하는 사람, 둡둡을 붙잡고 싶어서 탱크로 향했던 양우, 자신만의 신념을 품고 묵묵히 아들을 기다리는 규산, 사이비종교의 시작을 두려워하는 부경. 컨테이너 하나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과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뿔뿔이 다른 길로 나아간다.


거기에 강규산은 이렇게 적었다.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 이것은 강규산 본인이 쓰면서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던 문장, 뭘 쓰는지도 모르고 그저 계속 쓰기 위해서 쓰게 된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규산은 자신이 뒷도 모르고 쓴 문장의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미래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강규산과 강규산의 전부를 통과해 과거로 행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강규산의 마음에 많이 공감했다. 현재는 반드시 과거가 되고, 내가 꿈꾸고 손에 잡고 싶었던 미래도 언젠가 과거가 되기에 매사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과거는 수정이 안 되기 때문이다. 수정이 되고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미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아들의 미래가 혹여나 수정되진 않을까, 아들의 현재가 과거가 되면 언제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탱크는 힘겨운 사람들에게 믿음을 붙들어 매 줄 공간으로 작용한다.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이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사자는 절망에 압도당해 믿음을 가질 대상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의 절망이 오밀조밀 모여 탱크가 생겨나고 전설을 만들어간다. 그게 불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피폐하다.


생각해 보니 탱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때 행복했지만 현재 행복하지 않고 행복한 미래 역시 그려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어딘가에서도 썩은 나무에 자라는 버섯처럼 각자의 탱크들이 자라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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