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럴 수 있다' 고 말해주세요
요즘의 나는 나를 싫어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아.
핸드폰 메모장에서 발견한 올해 5월 초에 쓴 짧은 일기의 도입부였다. 메모 어플에는 대체로 사이트 비밀번호나 매도할 주식의 목표 가격을 적어두는 편이라, 그 사이에 끼어버린 이질감 넘치는 저 한 문장에 나는 기겁하고야 말았다. 내가 저런 문장을 썼었다고? 맞네, 썼었네. 도대체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실은 너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를 싫어하도록 작정한 사람처럼 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까. 순도 99.9퍼센트의 창피한 기억이라 낯이 뜨겁다 못해 재가 되어 타버릴 것 같은 나머지 내 인생에서 없었던 일인 셈 치고 잊고 살았었다. 휴지통 복원 버튼을 누른 것처럼 삽시간에 내 옹졸했던 모습이 복원되기 전까지.
인생의 절반을 넘게 아이돌 덕후로 살다 보면, 일반화를 할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트위터를 접하게 된다. 오죽하면 트위터 CEO가 트위터의 성장은 K-POP 팬덤 덕분이라고 말했겠는가. 덕질의 주요 플랫폼으로 여겨지는, 온갖 나이스한 정보와 헛소리, 싸이버불링과 친목이 도사리는 그 작은 카오스 세상에 “끼얏호!” 하며 나는 그만 가열차게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됐었는데!) 나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건 편리하면서도 사람을 돌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반강제로 알아버리고 말았지만. 정확히 나의 졸렬함에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돌 팬질의 생리를 너무 잘 아는 나는 최애 생일이 다가오면 우울감에 빠져든다. 최애가 저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우울한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을 시기하기 때문이라면 믿으시겠어요? 하핫, 저도 안 믿기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더라고요. 4월에는 최애의 생일이 있었고 대부분의 아이돌 팬들은 자기 최애의 생일이 다가오면 자발적으로 이벤트를 벌여서 최애의 생일을 온 세상에 알리곤 한다. 흔한 이벤트 중 하나가 바로 리트윗 이벤트인데, 상품을 하나 걸고 ‘사랑하는 ㅁㅁ의 생일을 맞이해 상품을 드립니다. 리트윗만 하세요!’ 하며 리트윗 기능을 이용해 최애의 생일을 널리 퍼트리는 것이다.(일종의 '정보 공유' 기능인 셈이다) 나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최애의 생일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이벤트 물결에 저항 없이 몸을 싣고 표류하고 있었다. 아, 정말 그 기간에는 정신건강을 위해 트위터를 끊었어야 했고, 인간의 쾌락을 향한 욕심은 끝이 없으며 나는 그만 트위터를 또 켜고야 마는데... 나와 최애가 같은 팬이 고가의 상품을 걸고 리트윗 이벤트를 진행하는 걸 목도하고야 만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감정과 마주쳐야 했다. 평소에도 그가 쓴 트윗은 내 타임라인으로 자주 넘어왔고, 염탐의 결과로 집적한 나만의 빅데이터에 의하면 그는 돈과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람인 듯했다. 내가 사고 싶었던 물건도 척척 사거나 기부도 몇 십만 원씩 하는 그의 대자본과 직장인이라고 하기엔 밤낮없이 즐기는 취미생활. 아이디어 넘치는 재밌는 글솜씨와 화룡점정을 찍어버린, 최애의 생일을 맞이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뿌리는 고가의 사치품! 나는 그만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아씨, 내가 졌네. 또 나만 재미도 없고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이었군! 그는 내가 욕망하던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랑 최애도 같아. 나의 결핍된 부분만 향해 잽을 날려대는 그의 트윗 세례를 열심히 부정했는데, ‘리트윗 이벤트’라는 어퍼컷 펀치와 함께 나는 벌러덩 나자빠져 버렸다. 패배 선언과 함께 내가 뱉어낸 건 마우스피스도 아닌 바로 '질투심'이었다.
순간 너무 괴로웠다. 왜, 왜 내가 제일 잘나지 않았지?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좋았더라면. 내가 돈이 많았다면 나도 이런 이벤트를 열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최애를 온 마음으로 좋아하는데. 왜 나는 돈 몇만 원에도 벌벌 떨면서 내 마음을 동네방네 전시할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내가 번 돈마저도 온갖 계산기를 두들겨 가면서 써야 하는 거지. 남의 트위터를 훔쳐보면서 이렇게 질투나 하다니. 나는 이 사람 얼굴도 모르고, 심지어 이 사람은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텐데. 나를 마구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나니 찾아온 결말은 짜잔! 우울감뿐이었다. 최애의 생일을 맞이해 나에게 우울감을 선물하는 건 상상보다 끔찍한 경험이다. 나는 내가 너무 피곤해. 이 모든 게 내가 돈이 없어서라는 생각에 일하다 말고 충동적으로 온라인 연금복권을 샀었다. 다달이 들어올 큰돈을 가지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며 오천 원으로 일주일을 행복해했고, 역시나 일주일만 반짝 행복했다. 허구의 행복을 구매한 셈이 되어버린 나는 낙첨된 다섯 조의 응모번호를 노려보며 ‘취미마저 온전히 못 즐기는구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었다. 그렇게 4월 말부터 한 달가량은 부박한 마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기로 정한 사람처럼.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앨범을 발매한 가수들은 대면 팬 사인회를 열지 않고 비대면 온라인 영상통화 이벤트로 팬 사인회를 대신한다. 팬 사인회의 경우는 내부 촬영이 통제되어 사진 없는 후기만 구천을 떠돌 듯 온라인을 떠도는데, 영상통화의 경우는 통화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영상통화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이 최애를 녹화한 영상을 올린 글은 일종의 후기로 대체된다. 나는 영상통화 이벤트가 다가올 때마다 그 영상을 찾아보며 지치지도 않고 부러움에 고통받기를 자처한다. (이때도 트위터를 껐어야 했는데...) 질투의 다른 이름은 각설이었던 걸까요. 나의 시기와 질투는 죽지도 않고 각설이처럼 또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위가 꼬이도록 부럽지만 나의 최애랑 통화해서 부러운 건 아니었다. 가끔 팬사인회나 영상통화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아이돌 앞에서 해주고 싶은 말은 ‘아프지만 말라’는 말뿐이었다. 그마저도 오만 사람들이 다 자신의 최애를 앞에 두고 그 얘기를 할 테니 잔소리로 느껴질까 봐 상상 속에서도 조심스러웠다. 내가 진짜 부러운 건 그게 아니야. 나는 팬사인회에 당첨된 사람들이 예쁜 옷을 입고 세팅된 머리를 한 최고로 꾸민 모습으로 최애 앞에 앉아있는 게 부러웠다. 그 비싼 금액을 단 1-2분을 위해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질투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내 질투심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칠거지악을 범하였다며 엉엉 울며 집안에서 쫓겨나도 모자랄 판이었다. (다행입니다. 지금이 21세기라서)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듯하다. 질투를 나의 힘으로 삼아 더 나은 나로 발전하려는 사람과 질투심에 잠식되어버리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경우는 후자였다. 나만 잘났으면 좋겠는데 내 주변엔 나보다 잘난 놈이 천지라 나의 못남에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 일렬로 줄을 세워 개인의 능력치를 따져본다면 나는 끝자락에 간신히 발 딛고 서 있는 건 아닐까 항상 두려웠다. 난 늘 천하제일 일짱이 되고 싶고 그러지 못해서 슬플까. 그럼 노오오력이라도 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나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았냐’고 어린아이처럼 떼만 쓸까. 이상과 현실에서 오는 낙차를 견디는 짓을 삼십 년이 넘게 하고 있는데 아직도 버겁다.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고 싫어하는 건 최애에게 느끼는 나의 양가적인 감정이다. 나는 네가 너무 사랑스럽고 네 덕분에 하루가 즐겁고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근데 너무 잘 나가는 건 싫어.(정신 차려라, 나 자신아. 그 그룹엔 심지어 너랑 띠동갑인 애가 있어…) 음악방송에서 1등 시켜주겠다고 시간에 맞춰 투표하다가도 이내 관두었는데 그 이유가 아차, 싶어서였다. 내 생각보다 순위가 너무 높은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소름 끼쳤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네가 적당히 망했으면 좋겠다.(미안해. 잘난 널 조금 미워해. 그래도 너무 사랑해!) 네가 비싼 명품 옷을 입고 가방을 들면 질투 나. 나는 평생 만질 수도 없는 돈을 너는 일 년이면 번다는 생각에 미운 마음도 들어. 다들 이렇게 까빠가(까빠는 욕하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팬을 의미한다) 되는 걸까. 나는 너한테도 주제넘게 내가 더 잘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 마음은 그러니까 네가 적당히 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해버렸어. 아예 망하면 네가 힘들 테니까 그건 안 돼. 여러모로 정말 최악이네. 미안합니다. 질투심과 자기혐오가 범벅이 되어 미쳐버릴 것 같을 때마다 ‘마음 도살장 같은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상상하곤 한다. 이런 마음을 도살해주는 곳이 있었다면 아마 내가 1호 고객이지 않을까. 사실 이런 얘기는 어디 가서 속 시원히 털어놓기가 힘들었다. 일단은 이 나이 먹도록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 자신이 쪽팔리고(내 나이가 어때서요), 연예인을 안 좋아하는 지인들에겐 “근데 아직도 연예인 좋아해?”라는 반응이 우세할 것이며(어쩌라고), 덕후들에게는 까빠라고 욕을 먹겠지. (판사님, 억울합니다. 저는 최애를 욕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을 뿐이라고요. 오히려 내색도 하지 않는 저에게 노벨젠틀맨상 뭐, 그런 거라도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너무 지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최애에게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왜 이상한 지도 잘 모르겠다.
이게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는 반증일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요즘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문자 그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 ‘네 말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겸사겸사 쓰는 중이다.
그럴 수 있다고 억지로 세뇌시키면서도 나를 향한 나의 혐오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나이 먹도록 본인을 싫어했으면 질릴 만도 하지 않나? 자기혐오는 중독과 결이 같아서 멈추기 어려워. 나는 고도로 발달한 사디스트였던 걸까. 다들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지?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나는 밉상 짓만 골라서 하는 내가 너무 지겹고 나에게 못되게 굴고 싶고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라고 욕하지만, 그런 내가 너무 가엾어서 마구마구 내 불행을 전시하고 싶다. 사실 넌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이 듣고 싶어. 자기 확신이 없는 편이라 남이 말해주면 혹하면서도 고집은 또 세서 귀담아 안 듣기는 한다. 아마 나는 ‘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고 말하며 반항심을(높은 확률로) 가질지도 모르겠다. 뒤늦은 사춘기라 우겨보고 싶은데 사춘기는 이미 오래전에 온몸으로 관통해냈다. 그래서 저는 이걸 자기혐오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자주 다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은 글을 보았다. 질투심이 너무 많은 자기가 이상하고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아아, 저는 그만 과몰입하고 말았습니다…)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그런 감정은 충분히 들 수 있다고. 그 대신 티만 내지 않으면 그걸로도 충분한 것 같다는 어쭙잖은 위로의 댓글을 써주고 싶었는데 결국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해 줄 말이 없어서.
이미 달린 수많은 댓글들은 작성자에게 네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는 충고를 가장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상냥한 손가락질이 존재한다는 걸 거기서 보았다. 그럴 수 있구나. 지구촌 인구가 칠십억이 넘는다 생각하면 뭐든 이해가 되긴 하지만, 거기에 대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들이 보기엔 나도 이상한 사람인 걸. 이상한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것도 모양새가 좀 웃겨서 그냥 포기했다. 이 글에 나만 이렇게 공감한다고? 모두들 다 나처럼 질투하면서 사는 게 아니고? 나만 질투심에 미쳐버렸던 거야? 또 나만 질투쟁이었구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아침드라마 속 주인공은 이런 심정이었겠어.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모두 나만큼의 질투는 하고 사는 줄 알았던 나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남들은 모르는 은밀하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인은 다 알고 나에게만 비밀스러운 또라이가 바로 나였다.
‘나’라는 인간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포장한 것 같긴 하다. 아무도 나의 본모습을 모르는 것 같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너무 잘 포장했다는 결론과 함께 또다시 괴로움에 저미 되고야 만다.(네, 또 시작입니다. 그냥 지나가세요) 나는 질소 과자야. 과자로 꽉 차 있을 거라고 잔뜩 신나서 봉지를 까면, 그 안의 질소는 다 빠져나가고 요만한 과자 몇 점만 남은. 그 한 줌이 나 같고, 그거라도 먹어보겠다고 입에 넣는데 맛은 또 더럽게 없어서 “이딴 과자 다시는 안 산다.” 며 다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과자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내 정체를 알고 나면 다들 그런 마음으로 나를 대하겠지. 왜 아무도 내가 쓰레기인 걸 모르지?(그야 누구보다 열심히 숨겼으니까) 빨리 내가 쓰레기인 걸 알아줘. 여러분, 저는 세상에서 제일 답 없는 쓰레기입니다! 모르셨죠? 그럴 줄 알았어요. 저는 사실 친구에게도 어마 무시한 질투를 느낀답니다. 너는 왜 나보다 못났는데도 잘 나가냐고 하면서요. 빨리 저를 향해 인신공격을 하세요, 흑흑. 간장종지보다 작디작은 내 마음을 탓하며 갖은 트집을 잡아내 또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끊임없이 나를 미워하다 너무 괴로우면 술을 마시고 지갑 사정을 예견했던 내 주량은 귀엽게도 맥주 한 캔 뿐이라 가성비 넘치게 금방 취하고 만다. 그리고 지독한 욕심쟁이를 겸업 중이기에 남들이 하는 건 질 수 없으니 모두 따라 한다. (놀랍게도 숙취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 날 머리가 아파 두통약을 먹으면서 아, 간이 파괴되어 이렇게 요절하는 건가… 하지만 대체로 보통의 날은 적당한 즐겁고 안온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 또한 지나가겠지’, 꾸역꾸역 버텨본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어. 자신의 못난 점은 애써 숨기며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나'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거라고. 나를 이해하기 힘들어도 '그럴 수 있다'고 고개만이라도 끄덕여 주었으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독일어에는 ‘남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나의 기쁨’을 의미하는 ‘샤덴 프로이데’라는 말이 있다는데 이런 제 감정에도 샤덴 프로이데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질투와 결이 비슷한 이 감정은, 비록 나에게 적확한 단어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분이 비슷하게나마 명사로 박제되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위로였다. 명시될 정도의 감정이라면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의미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