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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언제부터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되었나

추석, 모욕과 침묵이 남았다

by 보통날의 안녕

늦은 오후, 약을 먹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집 안엔 고요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약 먹을 시간을 한참 넘긴 뒤라, 몸 구석구석이 타들어가듯 아파왔다.

물을 한 모금 삼키고, 통증을 누그러뜨릴 약을 털어 넣었다.

다시 바닥에 몸을 눕히고 나서야 생각났다.

오늘은 추석이었다.


결혼하고 이렇게 조용한 명절은 처음이었다.

그는 추석 집안 행사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남편이 언제 사라졌는지, 집에 없었다.

연휴 내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던 그는 결국, 아무 말 없이 혼자 본가로 간 모양이었다.


점심은 이미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밥을 챙길 기운도 없어 다시 바닥에 몸을 눕혔다.


어둠이 스며드는 오후 5시 무렵,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집은 적막했고, 그 안엔 나 혼자뿐이었다.


전날 엄마가 해주고 가신 음식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시작했다.

겨우 차린 음식을 입에 넣고 억지로 씹고 있을 때, 그에게서 톡이 왔다.

"차가 너무 막혀서 늦을 거 같아. 먼저 밥 먹어."


전날 엄마가 집에 왔을 때, 그는 마치 엄마를 가사도우미 대하듯 무례하게 굴었다.

그 불쾌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다정한 척 문자를 보내오다니, 어딘가 뒤틀린 기분이었다.

연휴 내내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기묘할 정도로 어색했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톡은 이후, '아픈 아내를 걱정해 챙겼지만 무시당했다'는 그의 주장에 아주 그럴듯한 '증거'가 된다.

그날의 한 줄 문자.

나는 그게 내게 칼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딘가 불길한 진동음이, 조용한 집 안을 흔들었다. 그 요란한 소리에 흠칫 눈을 떴다.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끊겼고, 곧바로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로 방정맞은 진동음이 날카롭게 다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내 양 어깨를 베어내는 칼날 같았다.

차갑고 날카롭고, 숨소리는 거칠고, 말은 빨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걸, 목소리 하나로 정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넌 젊은 애가 맨날 그렇게 아프고 난리냐?"


인사도 없이 그렇게 통화는 시작됐다.

집안 어른들께 성묘드리는 중요한 추석 일정에 며느리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그녀는 그 분노를 전부 쏟아 붓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


"넌 맨날 누워서 잠만 잔다며?"

그 말투에는 내가 팔자 좋은 사람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추석에도 집에 오지 않은 여자로 보였다는 모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모든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응할 가치도,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세상에서 가장 착하다고 자랑하던 당신 아들이 병든 아내를 버리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때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참기만 했을까.


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으로 너덜너덜해진 내게,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큰 아들이 당뇨 초기 진단을 받아서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의 둘째 아들 때문에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인데, 이제는 큰 아들 걱정까지 들어줘야 하나?


합벽증도 없는 초기 당뇨.

식단 관리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가슴이 찢어질 만큼 힘들다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어머니'라고 부르던 그녀는, 결코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자식이 식단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저토록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몸이 찢기도록 아파하는 며느리에겐 얼마나 모질게 구는지.


만약 병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대부분은 병의 상태를 걱정하며 위로하고 공감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자식도, 지인도 아닌 존재였다는 말이다.


요즘은 '며느리 눈치를 본다'며 투정을 부리는 시어머니들이 늘었고,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시어머니'라는 호칭 하나만으로 권위를 당연시하며 친절을 가장한 언어폭력으로 며느리를 후려치는 집안은 많다.


시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의 냉랭한 태도와 무례한 말들이 불쑥불쑥 날아들었지만, 그는 늘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야."

"네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우리 엄마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너, 그게 더 문제야."


결국 이 모든 일들은, 이혼 소송에서 '이상한 며느리의 피해망상'으로 둔갑했다.

그는 "별일도 아닌데, 사사건건 우리 집 일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라며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이혼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섯 살 조카도, 우리 집 고양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 사람에겐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누가 나를 써려하는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그들에게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고 싶었던 적도 없다.

다만, 타인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만은 받고 싶었을 뿐이다.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막말을 쏟아내고, 내가 그저 한 귀로 듣고 넘길 거라 여겼겠지만.

내 앞에서 우리 가족까지 걱정해 주는 척하며 험담하는 일만큼은, 정말 그만두기를 바랐다.




아마 그녀는 내가 억지웃음소리를 내며 "몸이 아파서 같이 못 가서 죄송해요"라고 말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내가 성묘를 가지 못한 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령 먼 거리를 달려 산소에 간다 한들 나는 그 조상님께 절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여자라서 절을 하지 말라 했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이라도 되는 듯, 절하려는 나를 막으며 민망함을 안겨주었고 나는 뒤에 조용히 서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성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


아픈 며느리에 대한 배려도, 존중도 없으면서 '추석은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는 모순된 기대를 그들은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 태도는 전통이 아니다.

그저 악습일 뿐이다.


사회가 이렇게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양반가문 흉내를 내며 며느리에게 '노릇'을 요구한다.

'원래 그랬다'라는 말로.


그날, 난 전화 통화 내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막말에 가장 평화롭게 대응하는 방법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뿐이었다.





추석 전날 그가 엄마에게 하대를 하던 모습과 다음날 시어머니에게 막말을 듣고 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시어머니와 장모는 이렇게도 다른 위치에 놓여 있는 걸까.


다른 집 엄마들은 사위에게 이름도 부르고 반말도 하며 편하게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지만 우리 엄마는 대단한 의사 사위가 부담스러운지 늘 눈치를 보며, 때로 존댓말까지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싫었다.


추석 전날, 엄마는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오셨다.

언제나 그랬다.

미리 연락을 하면 내가 오지 말라고 할게 뻔했기 때문에.

늘 말없이 집을 찾아오셨다.

아픈 나를 대신해서 청소며 요리를 해주려고.


8월 중순, 엄마는 갑상선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까지도 당신의 병보다 내 병을 더 걱정했다.


그리고 퇴원을 하신 뒤, 곧장 우리 집으로 향하셨다.

목에 붕대를 감고 나를 간병하는 엄마의 모습은 미안하고 무거워서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웠다.


엄마가 우리 집을 오시는 길은 멀고 험하다.

버스를 두 번,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야 한다.

30년을 식당을 하면서 자식 넷을 키운 엄마는 허리가 굽어 걷는 것도 힘들다.

그런 엄마가, 수술직후에도 무거운 음식 보따리를 들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내게 오셨다.


그 해 추석은 유난히 더웠다.

현관 앞에 선 엄마는 땀을 흘리며 바리바리 음식 봉투를 들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장 부엌으로 가 설거지를 시작하셨다.


남편은 엄마가 와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동현관 소리, 집 현관 벨소리, 거실에서 오가는 대화소리, 그 모두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안마의자에 앉은 채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 문은 열려 있었고,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은 엄마에게도 분명히 보였다.


엄마는 사위가 집에 있는 걸 알았지만 끝내 인사를 받지 못했다.

말없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한참이 지난 후, 엄마는 물었다.

"O서방은 집에 없니?"

그제야 나는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말했다.

"엄마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제야 겨우 그는 나와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이 사건은 이혼 소송 서면에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귀가 들리지 않아 못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고양이 때문에 모든 방 문을 닫지 않고 생활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방문 너머에 앉은 그를 확인했고 그는 안마의자에 앉아 있었다.


'못 들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안마의자에 앉으면 주방이며 식탁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귀도 안 들리고, 앞도 안 보인단 말인가.

아니면, 그 시각 상간녀와의 대화에 몰두하느라 눈앞에 어떤 것도 보지 못했던 걸까.





그는 그제야 거실로 나와, 멀뚱멀뚱 소파에 앉았다.

장모가 요리며 청소를 해주러 왔다지만, 가사도우미는 아니다.

멀리서 온 손님이고, 게다가 아픈 아내를 대신해 일하는데 음료 한 잔, 과일 한 조각 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거실 한쪽에는 명절 선물세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김영란법 따위 비웃기라도 하듯, 고가의 선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냉장고엔 선물로 받은 고급 과일 세트가 가득 차 있었다.


엄마도 그걸 분명 봤을 텐데, 그중 하나도 꺼내지 않는 그를 보고 있자니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투병 중 빨래가 쌓여도 세탁기 하나 돌리지 않았다.

"방법을 몰라서"라는 게 이유였다.

스스로 가장 스마트한 사람이라고 늘 자랑을 하던 사람이 누가 봐도 직관적인 최신형 AI 세탁기 하나 못 다룬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겨우 돌리고 건조까지 한 빨래는, 정리할 힘이 없어 소파에 올려두는 게 전부였다.

그는 그 산더미 속에서 옷을 '고구마 캐듯' 꺼내 입었다.


엄마는 주방일을 마치고 소파 위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그는 그 옆에 앉아 채널만 돌렸다.

자신의 팬티를 개고 있는 장모를 두고, 그저 TV만 바라보는 그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잠시 후, 엄마는 "내일 추석이라 바쁘다"며 일어섰다.

거실 한쪽에 선물이 산더미처럼 있는데도 그는 엄마를 빈손으로 보냈다.

가사도우미였어도 추석 전날이면 참치 세트 하나쯤 챙겨주는 게 상식 아닌가.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생색내듯

"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하고 따라나섰다.

그 길도 고작 10분.

금세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안마의자에 누워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남편 본가까지의 거리와 부모님 집까지의 거리는 킬로 수까지 정확하게 똑같다.

자기 부모가 오면 모시러 가고, 모셔다 드리기를 반복하면서 아픈 아내 대신 장모가 일하러 온 날은 역 앞에 내려주고 끝이었다.


그 문제로 다툼이 있었을 때, 그는 나에게 별것도 아닌 걸로 시비를 건다며 짜증을 냈다.


아픈 아내를 대신해 장모가 먼 길을 와서 집안일을 해주고 갔는데,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것마저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사람이, 과연 가족을 대하는 최소한의 마음은 있는 걸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많던 과일은 사라지고 샤인머스켓과 망고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명절 선물 세트 역시 전부 자신의 부모 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그 과일을 현관 쪽으로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잠시 후 집에 들어온 그는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보더니 말했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너랑은 못 살겠다."


그 순간, 억지로 봉인했던 감정이 폭발했다.

그는 이혼 서면에서 나를 '괴팍하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일관되게 묘사를 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서면에서는 '성묘를 다녀온 자신에게 과일을 던져다'로 내용을 부풀렸다.


나는 결혼 생활 동안 그에게 물건을 던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툼 중에 물건을 던진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하지만, 이혼을 원하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나는 그의 母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 내가 일어나지 않아서, 나를 배려해 혼자 성묘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고마운 것도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말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네 조상 성묘를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 말을 서면에 '자신의 조상을 모욕했다'라고 적었다.

죽은 이를 향한 예의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살아 있는 장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행동.

나는 그 모습을 설명할 단어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가사조사에서는 처음으로 시어머니와의 통화가 언급되었다.

그는 그 전화를 '안부전화'라 포장하며, 내가 부모 이야기에 과민하게 반응한다며 나를 탓했다.


그녀는 아마도 나와 통화를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말하며 집으로 온 아들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전화가 불씨가 되었을까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부전화'라는 포장지를 씌웠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막말을 퍼붓고도 '안부전화'라고 부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가해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그저 친하게 지냈을 뿐"

"도와주려고 한 말일뿐"

그리고 자신이 한 폭력을 미화하며 부정한다.


그녀의 말은, 뉴스에서 자주 보던 폭력 자해자들의 변명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소름 끼칠 만큼.





다툼 끝에, 남편은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네가 예전에 왜 이혼을 당했는지 이제 알겠다. 잘 생각해 봐."
"너 같은 애가 무슨 결혼이냐. 넌 결혼 같은 건 하면 안 되는 애야."


순간, 숨이 막혔다. 저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말은 약 15년 전, 나를 무너뜨렸던 그 사건을 건드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함부로 꺼내며
나를 정서적으로 짓밟았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덮쳤다.
그 순간, 그의 의도는 완벽히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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