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조사실에서 듣게 된 단 한마디. “저 여자랑은 절대 못 삽니다.”
조용하던 복도에 낯선 발소리가 울렸다. 그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은 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가 왔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9개월 만이었다.
그가 집을 나간 뒤,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달라 보였다.
부은 듯이 살이 올랐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듯하지만 눈빛 깊은 곳엔 억눌린 분노가 겹겹이 쌓여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일부러 거칠게 숨을 내쉬며 씩씩거렸다.
화가 났다는 걸 티 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 감정을 다스릴 줄을 여전히 모르는 걸까.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그랬다.
한마디 말도 없었다.
서로를 외면한 채,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앉았다.
오늘은 가사조사를 받는 날이었다.
과하게 조용한 복도,
서로 등을 돌린 채 멀찍이 앉아 있는 또 다른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와 본 법원,
나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법정 앞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 변호사와 다급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이혼을 하러 온 사람들.
이 공간에는 저마다 다른 무너짐이 있었다.
담당 조사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아주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책상 하나, 컴퓨터 한 대, 그리고 의자 세 개.
단출한 구성인데도 방은 숨이 막힐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와 내가 나란히 앉아야 하는 의자 사이엔 투명 플라스틱 칸막이가 놓여 있었다.
적어도 이 벽 하나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지켜줄 거란 생각에 가느다란 안도감이 들었다.
조사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철저하게 훈련된 표정이었다.
신원을 확인한 뒤, 그는 서류를 넘기며 질문을 시작했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멍하니 조사관을 응시했다.
며칠 전부터 변호사는 반복해서 당부했다.
“가사조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절대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마세요.”
특히 아직 증거 수집이 끝나지 않았기에,
그들의 불륜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원고, 나는 피고.
그는 자유롭게 주장하고 공격할 수 있지만, 나는 반박이 아닌 방어에만 집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발언이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고, 그럴수록 나의 감정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변호사는 잘 알고 있었다.
“분노하거나 감정이 격앙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상대를 비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냉정하게, 방어만 하세요.”
그 조언을 되새기며 조사실에 앉아 있는 지금,
변호사가 말했던 ‘아주 어려운 시간’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그는 작정한 듯, 나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며, 함께 사는 동안 자신은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괴팍한 사람이며,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는 존재였다는 식으로 일방적인 주장을 이어갔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반박의 기회를 요청했고, 그의 발언에 대해 차분하게 사유를 설명하며 대응했다.
그런데 곧, 내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제가 집을 나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 여자랑은… 절대 다시는 살 수 없습니다.”
‘저 여자’—그는 내 앞에서,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듯한 표현을 쓰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당당히 말했다.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삶을 포기하려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부모님과 나는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그는 내 앞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상간녀와 매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은 모두 내게 떠넘긴 채 도망치듯 바깥에서 누리는 평온이 그렇게 달콤했던 걸까.
그렇다 해도,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순간, 입가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고 싶어졌다.
그의 외도를, 이 자리에서 폭로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올라왔다.
하지만 간신히 입술을 다물고, 속으로만 그 분노를 삼켜야 했다.
그는 집요하게 ‘정신이상’이라는 프레임을 나에게 씌우며 공격을 이어갔다.
그때, 조사관이 조용히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런데요… 제 눈엔 아내분께서 지금 너무 평온하게 앉아계신데요. 정말 감정조절이 안 되는 분이 맞으신가요? 제가 보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신경안정제를 두 배로 복용한 덕분에 겉으론 아무 일 없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조사관은 그의 주장에 미묘한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 그가 아닐지—조금은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조사관은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묘한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쪽이 과연 누구일까—그 순간, 무너졌던 균형이 조금은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사관은 나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내분, 지금 남편분 손 한번 보세요. 손이 떨리고 있네요.”
나는 곁눈질로 그의 손을 확인했다. 정말로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저 무표정하게, 아무 말 없이 다시 조사관을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이라 함께 살 수 없다’고 주장하던 그는 정작 자신의 말이 점점 설득력을 잃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온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짐 없는 자세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사관은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엔, 아내분이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신경질적이거나 특별한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네요. 한 달 뒤,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번 가사조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참석 가능하신가요?”
그렇게 첫 번째 가사조사는 끝이 났다.
서로의 주장은 끝내 팽팽히 맞섰고, 명확한 이혼 사유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조사관은 다음 조사를 예고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 입구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공황발작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공황증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바닥에 누운 채로 참아왔던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머릿속에는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이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하다'라고 말하던 그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자신의 불륜을 내가 모를 거라 믿고 감히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분노를 자극했다.
이혼 소송 과정을 통틀어 가장 참기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날의 가사조사였다.
그동안은 서면으로만 이어지던 비난을, 면전에서 직접 듣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것도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감정을 억누르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던 입장은 말할 수 없는 모멸감으로 다가왔다.
그날의 충격은 내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결국 나는 이후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거의 누운 채로 보내야만 했다.
2차 가사조사일이 다가오던 무렵, 나는 결국 변호사에게 조사를 받으러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 그날 이후 공황발작이 수시로 찾아왔고, 그 좁은 조사실에서 다시 발작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다.
변호사는 조사관에게 연기를 요청했지만, 조사관은 단호하게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짧은 답변을 내놓았다.
변호사는 절대 그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며 끈질기게 연기 요청을 했다.
결국 그는 예정대로 혼자 가사조사를 받게 되었고, 나는 한 달 뒤, 혼자서 그 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나를 뒤 흔들었던 긴장감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가사조사에서 하지 못했던 내 안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