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다가 춘천에 살게 되면서 큰 변화는 무언가를 배워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에서도 시간적 여유야 있었겠지만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오랜만에 해본 것 같다. 무엇을 배워볼까 고민하다가 바리스타 학원에 가보기로 했다. 카페를 차려보겠다는 거창한 계획이 있던 건 아니고 그냥 평소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더 생긴 것은 명확한 직장이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사 다닐 땐 그냥 출퇴근만 하기도 빡빡했으니까 뭘 해봐야겠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춘천으로 지역을 이동해서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일 없으면 백수나 다름없지만, 감사하게도 종종 일을 맡겨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당장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다. 업무 의뢰가 들어오면 예상치 못한 미팅이 잡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춘천에서 서울은 ITX 열차를 타면 한 시간 남짓의 생각보다 짧은 거리지만, 서울까지 나가야 한다는 심리적 거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주말 반 수강을 선택했다. 평일에 한두 시간씩 자주 나가는 것보다는 토요일 하루 네 시간씩 짧고 굵게 배우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수강생은 나를 포함 다섯 명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어머님 두 분, 이제 대학 입학을 앞둔 남학생, 애견카페를 준비 중이라는 여학생 그리고 만 나이를 즐겨 사용하게 된 나. 간략한 자기소개를 했다. 어머님 두 분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복지관 카페 같은 곳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고 남학생은 대학에 가서 카페 알바를 하기 전에 미리 배워두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여학생은 애견 카페를 준비하는 중인데 커피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고. 생각보다 엄청난 포부에 기가 눌려 나 또한 언젠가는 카페를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더듬거리며 말을 했더니 선생님이 ‘아 취미로요’라고 요약해 주었는데, 어쩐지 단순히 취미만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첫 시간은 교재를 받고 간단한 이론과 에스프레소 추출 실습 같은 것들을 했다. 카페에서 어떻게 커피를 만드는지 궁금했는데 몇 번의 실습을 통해서 대략의 과정은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어머님들은 자격증 취득이 중요하신 듯했다. 시험 볼 때도 수업과 같은 프로세스로 하는지를 궁금해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쉬는 시간에는 자신들이 왜 그렇게 자격증에 목말라하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셨다. 자격증이 없어도 카페에서 일은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자격증이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스스로 떳떳하지 않겠냐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지긋하신데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청년 같았다.
사실 내가 놀란 것은 그다음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에 맞춰 겨우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무언가를 열심히 지우고 계셨다. 교재 뒤편에 실린 예상문제들을 한 번씩 풀어보시고 답안을 지우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교재를 들춰보지 않았는데, 어머님들은 교재를 한번 다 보고 문제까지 풀어본 것이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가 띵 했다. 그 열심이 대단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자신이 강의를 해보면 어머님들이 가장 열심히 하신다며 젊은 분들도 분발하셔야 한다고 거들었다.
나이가 있어서 확실히 손은 느리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잔을 내려놓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에스프레소가 바닥에 버려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연습을 한다. 기억력도 좋지 않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걸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책을 보고 반복한다. 서로 틀린 부분을 봐주면서 깔깔 웃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왜인지 모르게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은 쿨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이제 알겠다. 진짜 멋지고 쿨한 건 잘난 척, 잘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다.
젊은 사람도 분발해야 한다는데 우선은 출석이 나의 열심이다. 교재를 끝까지 보고 시험 문제까지 풀어볼 정도의 열심은 아직 없지만 어떤 변수에도 강의실에 앉아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 목표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모습에 한발 더 가까워져 있겠지. 그날 두 젊은 친구는 출석하지 않았다. 30대 아저씨인 나와 어머님 두 분이 휑한 강의실 안을 복닥거리며 움직였다. 그래, 뭐든 출석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