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씨는 문득, 자신의 결혼이,
혹은 이 가정이 문제인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자신의 역사'돌아본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틀어졌을까?
또 난가? 내가 문젠가? 애를 낳은 뒤로는
도통 기억력이 미지수다.
당최 알 수가 없으니 찬찬히 하나씩 되짚어,
다시 한번 점검해 본다.
우선, 결혼 후에도 2년쯤 계속 다녔던
직장에 여전히 계속~ 다니고 있다.
다만, 두 번의 출산과 육아 휴직을
Full로 땡겨쓴 덕분에-
몇 년의 전쟁 같은 육아를
홀로 독박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편이 그나마 집안일을 같이 해서
수월했다지만, 그래서 남들은 나한테
배부른 소리라고 타박을 한다. 근데,
애 볼래, 밭 맬래? 하면 나는 주저 없이
호미 들고 앉은뱅이 의자 끼고 모자 쓰고-
밭일하러 갈 거다.
어... 물론 난, 우리 애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과 육아는 별개의 일이다.
그나마 애들이 좀 크는 대로 친정엄마
찬스로 겨우 회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예예예!
요 근래 이렇게 속으로 쾌재를 지른 적이 있나 싶다.
근데,
와~ 겨우~ 겨우 복직했더니만,
별의별 눈칫밥을 다 준다.
아, 집에서 겨우 숨구멍 찾아 나왔더니만...
애도 안 낳아본 것들이 진~짜 말이 많네.
골고루 가지가지 해재끼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코웃음 쳐봐도
스트레스가 첩첩산중 쌓이는 걸 막을 길이 없다.
스트레스 풀 게이지 상태로 벌~써 4년째.
반복 근무 중이긴 하지만 요즘엔 이마저도 팔자려니 한다.
취업불황 소리에 이직은 꿈도 못 꾼다.
그러니 좋게 넘기지 않고선 도무지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남의 편은 모를, 나 혼자만의 마음을
다독이며, 다독이며... 또 다독인다.
근데 나 한 번 제대로 묻고 싶다.
어이, 남의 편. 너 정말 모르니?
모르는 척하는 거니?
에휴~ 구겨진 진심 담긴 한숨 한 번 내쉬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주섬주섬 애들 이불 덮어주면서
나는 겨우 귀퉁이로 자리 잡아 배만 가린 채-
내일 출근을 위해 선잠에 든다. 그렇게 매일
그날의 하루를- 눈을 감으며 되새김질해 보면
참 지난하기 그지없다. 그냥 내가 그지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루가 지나가는 걸까?
정말 모르겠는 날들의 연속이다.
하루가 무탈히 지나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설핏 잠이 들었다 생각할 무렵-
무언가 귀에 거슬릴 때쯤이면 짜증이 머리끝을
쭈뼛거리게 만든다. 선잠에서 깨 눈을 뜨면,
눈이 안 떠진다. 억지로 손가락으로 벌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대충 첫째나 둘째 배 밑에 손을 넣어
깔린 채 뜨뜻해진 내 폰을 찾는다.
아직 고장 나면 안 되는데 진짜.
요번 달 돈 없는데...
충전기 빼고, 시간 확인하고 다시 화면을 끈다.
좀비처럼 으그극 기지개를 켜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어젯밤엔 또 누가
나를 발로 찼니?
큰아들이면 봐줄 생각 없다.
실없는 생각에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뒤로한 채,
겨우 또 몸을 일으키면,
어김없이- 그렇고 그런- 하루가 시작된다.
왜... 아무도...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니?
아침 등원은 말 그대로 전쟁이라는 걸...?
세상에~ 너 혹시 5살짜리랑 옷 입는 걸로 싸워봤니?
야, 쪼그만 게 벌써부터 팬티에, 양말에,
신발까지 지가 골라.
나 아주 미쳐버리겠다, 저 놈의 로봇
뿌셔버리고 싶어.
저 공주 머시깽이는 진짜 머리채를 잡아다
다 안 보이는 데다 죄다 던져놓고 싶어. 아 진짜...
미혼 때, 애 옷 이상하게 입힌 엄마들 보면서
별 꼴이라고 욕했던 과거의 나, 디져라 그냥.
네가 애를 키워 보기나 했냐? 뭘 알고 떠들어?
우와아, 근데 아직도 신발을 고르신다~...
벌써 5분째야...! 그래~ 니 흑역사지, 내 흑역사니?
근데 난 언제 출근하니? 걍 아무거나 제발 빨리 골라줄래~!!!
그렇게 아침 전쟁부터 진을 다~ 뺀 채로,
엑셀 있는 대로 밟아 정시 직전에서야 겨우
가방을 뒤로 숨긴 채
자연스럽게 눈치 보며 자리에 앉았다.
미션 석세스! 출근 완료 !
어느 날은 3시간짜리 일을 준다. 그럼 난
그걸 8시간에 맞춰 늘려하는 요령과,
어느 날은 12시간도 더 걸리는 지뢰를 밟게 되면
의리로 다져진 육아 동지들과 팀플로
조각조각 일을 나눠 짜 맞춘 후, 오탈자
검사조차 못 돌린 채- 힘을 내라는 위로가
위로가 아니게 된 마이너스 체력을 이끌고
안감힘을 쥐어짜며 퇴근 직전 가까스로,
마치 던지듯이 제출하고 튄다.
이게 우리 애엄마들 일상이다.
왜, 거짓말 같니?
몇 번의 경험을 지나고 나니, 어차피
잘했다고 생각한 날도, 못 했다고 생각한 날도.
다음 날 왕창 깨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럼 뭘까? 칼퇴가 문제겠지.
어림짐작으로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억울함이 혼잣말을 뱉는다.
자기들도 지 배 아파 애 낳아 키워보라지.
어휴 지겨워.
운전대를 잡고 궁시렁궁시렁 혼잣말만 늘어가는
자신을 인지하면, 이게 또 그렇게 궁상맞고
처량하기 그지없다. 또 액셀을 밟고 이리저리
차선 변경의 달인으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 벌금이 더 나오려나?
쓸데없는 생각만 주구장창하며 애 둘 데리러
원에 가는 이 도돌이표 생활.
아주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다.
원에서 데려온 애들을 또 손 씻기고,
밥 먹이고, 안 잔다고 땡깡 부리는 것들을
어르고 달래다 결국엔 화를 내서 울려 재우는 밤.
시계를 보면 한 것도 없이 9시 반이 넘는다.
어영부영 이리저리 대충 훑어 치우고.
빨래 통에 넣으면, 내일은 꼭 출근 전 세탁기
맞춰놓는 거- 잊지 말아야지.
또 중얼중얼 거리며 냉장고 메모판에 적어놓는다.
적은 걸 보며 생각한다. 근데 이거 적어봤자
의미 없지 않아?
아침에 이걸 쳐다볼 여유도 없는데.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푸념 같은 잡념을 없애기 위해, 후다닥 씻고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적다 승질이 나면
이틀에 한 번 꼴로 도수가 거의 없는
작은 캔맥 하나 까서 입에 털어 넣는다.
에이씨. 숫자 틀려봤자 1, 2지 뭐.
0 하나 더 붙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캔맥을 까며 가계부를 다 적고 나면
시골 밥상에 앉는 할머니들처럼 한쪽 무릎을 괴고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동네 언니들의 말을 떠올려본다.
5년만 참아보라니.
난 진짜 5일도 못 참겠는데?
이쯤 되면-
평온한 일상이라는 게 오기는 하는 걸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힘든 마음에 아이 둘,
하원만 엄마에게 잠시 맡겼다.
다 늙어 골골거리는 노인네한테
어린것 둘을 맡겨놓고 매일 아침 울고불고
이산가족 이별하듯 헤어지는 날들의 반복...
몇 주가 지나니 이건 또 이 나름대로 지쳐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울음이 잦아들더니
이제는 방긋방긋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첫째와 둘찌. 그때까진 몰랐었다.
엄마랑 같이 노래교실에 가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속에서 천불이 나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누르며
퇴근길에 애들이 좋아하는 피자를 사서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사뭇 비장하다.
모깨비는, 처음 보는 - 빨갛고 파란색이
섞였다 갈라졌다를 반복하는 애증의 감정을
피어내는 정희 씨를 따라 정희 씨 집으로 통통통
따라가기 시작한다. 정희 씨는 까마득히 모른 채
끓어오르는 화를 무던히도 식히며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엄마 집에 도착한다.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보면,
천불이 나던 화도 한순간에 누그러지며
내 팔자가 그러려니 하게 된다.
더군다나 하루종일 애 둘을 보느라
앉은자리에서 일어날 때 앓는 소리 내며
일어나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차마 왜 우리 애들을 재롱부리게 만드느냐는 말은
속에서만 맴돈 채, 입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식탁에 둘러앉아 피자를 나눠 먹으며
서로 재잘거리는 애 둘을 각각 하나씩 맡아
피자를 작게 잘라 먹이고,
간만에 물놀이가 하고 싶다는 첫째의 말에
목욕물 받아 놀게 두고 다시 식탁에 앉아
남은 다 식은 피자를 엄마와 한 조각씩 물어뜯으며
겨우 한 마디 건네본다.
"엄마."
"왜."
"애들 노래교실 데려갔어?"
"응?"
"애들. 노래교실 데려갔었냐구."
"응 데려갔지. 그럼 내가 가야 하는데 애 둘을 놓고 어떻게 다녀와."
"거기... 그렇게 막 손자 손녀들 데려가도 돼?"
"아유, 안 그럼 어떡할 거야. 거기 노래교실 사람들 자식들이 다 맞벌이하는 게 한 둘인 줄 아니? 요즘엔 외벌이가 없댄다."
"... 그래?"
"응. 저번주에는 다른 집 애들도 왔는데 쟤들이랑 신나 가지고 구석에 가서 낄낄거리고 뛰어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주."
"정신없었겠네."
"우리 땐 다 그렇게 애 키웠잖아. 선생님도 별말 없으시니까 걱정 말고 너 일 해. 엄마가 쟤네 언제까지 봐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올해는 봐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는 걱정 말고 일하러 나가. 강서방 혼자 벌면 집을 언제 사. 너네도 이제 집 사야지."
마지막 말에 말문이 막힌 정희 씨.
입에 남아있던 피자를 삼키곤 다시 크게 한 입
피자를 물어뜯는다. 한 10여분을 그러고
말없이 먹고 있는데 난데없이 욕실에서
트로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첫째가 신나서 입에 붙은 트로트를 부르며 노는 것이었다. 동요가 나와야 할 입에서 트로트라니.
정희 씨는 심란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불편한 기색의 정희 씨를 보며 정희 씨의 엄마는 묻는다.
"얘.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아니야."
"아니긴 표정이 안 좋은데. 체한 거 같아?"
"아이, 아니야. 그냥 잠깐 딴생각했어."
"먹다 말고 뭔 안 좋은 생각을 하고 그래. 그런 생각 말고 얼른 마저 먹어치자."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먹고, 자리를 치우고, 애들을 씻겨
옷 입혀 양손에 하나씩 잡고 집으로 귀가한 정희 씨.
거실에 넓게 깔아놓은 가족 매트에 애들을 먼저 재우고
식탁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귀가한다.
"당신 씻고 와. 얘기 좀 해야 할 거 같아."
"뭔데?"
"일단 씻고 와. 얘기 길어."
"알았어."
20여분 뒤 탈의까지 마친 남편이
식탁 앞에 앉고, 정희 씨에게 묻는다.
"뭔 얘긴데 그렇게 거창해?"
"엄마가 애들 봐주시잖아."
"응. 왜, 힘드셔서 이제 못 봐주실 것 같대?"
"아니."
"그럼 뭔데?"
"노래교실에 애들을 데려가는 거야."
"장모님 다니시는 그 노래교실?"
"어어."
"거기 애들 데려가도 되는 거야?"
"다들 돌아가며 손주들 데려 온다나 봐."
"그럼 잘 됐네. 장모님도 혼자 애 둘 보시기 힘드실 텐데."
"첫째가 물놀이하면서 트로트를 부르는 거야."
"유정이가? 그새 노래를 배워서 따라 불러?"
"어어. 애가 몇 살인데 그 입에서 트로트가 나오냐고, 트로트가."
"당신 그래서 뭐 어떻게 하고 싶은데?"
"노래교실에 안 데려갔으면 좋겠는데, 엄마 요즘 유일한 낙이고... 나 일 그만두고 그냥 내가 애들 볼까 봐."
"당신 그렇게 복직해야 된다고 악착같이 애 낳고 3개월 만에 복직해 놓고 아깝지 않아?"
"아깝지... 아까운데, 그렇다고 애 입에서 트로트 나오는 걸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어떡해."
"애가 그럴 수도 있지. 지금 뭐든 다 따라 할 때잖아."
"암만 그래도 트로트는 아닌 거 같아. 당신은 나 그만둬도 괜찮겠어?"
"애초에 당신이 일하고 싶대서 그러라고 한 거지, 나 혼자 번다고 굶고 사는 거 아니잖아."
"아우, 모르겠어. 머리가 터질 거 같아."
은근 서로를 긁는 말들이 오가고,
결론은 당신 알아서 해.로 끝나버린 대화.
모깨비는 또 선잠에 들어 꿈도 안 꾸는 정희 씨를
한편에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남편의 '꿈길'을 따라 지은의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온 모깨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지은.
인간 세상의 복잡다단한 관계성을 차근차근,
모깨비에게 설명해 준다.
하지만 모깨비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관계의 사슬에 이번엔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몇 번의 낮과 밤이 지나는 동안,
정희 씨는 지옥과 현실을 오고 가는 마음에-
참고 참아왔던 우울이 툭, 하고 터져버렸다.
어느 아침, 눈을 떴는데 드는 생각이
'출근길에 차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
자신이 위험한 경계선을 외줄 타기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이럴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사실 정희 씨는 그렇게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들 연애하고 결혼하길래,
얼떨결에 흘러 흘러 흐르다 보니
누구 말마따나 상견례 자리였다.
이미 잘 차려진 밥상을 엎을 용기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이 남자랑 절대 못 살겠다는 확신도 없었다.
무던한 성격에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기 그지없다더니,
남 탓, 남 탓, 남 탓, 남 탓만 반복한다.
사실은 내가 생각만 바꾸면 되는 일인데.
하지만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편들이
이내 들썩이기 시작한다.
탕비실에 가면서부터 시작된 생각의 실타래는,
커피를 타는 그 짧은 사이 주삿바늘처럼 뾰족해진다.
우리 애 입에서 트로트가 왜 나와?
내가 애를 안 보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죄인이야?
왜... 나만 참아야 해?
커피믹스를 세 개나 집어 진하게 탄 커피를
달그락달그락 무신경하게 저으며 홀린 듯
입으로 가져가 마신다.
"앗 뜨거!"
마침 탕비실로 들어오던 두 명의 육아동지가
어머 어떡해, 하며 찬물을 받아 건네준다.
복받쳐 올라오는 설움에 눈물이 터진 정희 씨.
별안간 눈물을 보이는 정희 씨한테 놀란 둘.
꺽꺽거리며 대략 상황을 말하는 정희 씨와,
같이 눈물바람이 된 둘이 한동안 자리를 비우자
찾으러 온 팀장이 탕비실을 열더니 정희 씨를 호출한다.
난데없는 호출에 눈물을 감추고 팀장과
상담실에 마주 앉은 정희 씨.
"정희 대리님."
"네, 팀장님."
"제가 사생활은 정말 정말 안 묻는 거 아시죠?"
"네..."
"복직할 때 정희 대리님 모습, 저는 아직도 생생해요."
"네?"
"대리님 그때 어땠는지 기억나세요?"
".... 아뇨, 기억이 잘..."
"딱, 지금 같았어요."
"네?"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구요."
"아... 죄송합니다."
"아뇨, 대리님. 죄송하시라고 얘기 꺼낸 거 아니에요."
"..."
"애가 둘이라고 하셨죠?"
"네."
"오늘은 제 재량으로 반차 써드릴게요. 퇴근하세요."
물끄러미 팀장을 바라보는 정희 씨.
"그리고 가셔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해결하고 오세요. 복직한 직후에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리님 지켜봤어요. 그렇지만 결국엔 이렇게 다시 잘 자리 잡으시는 거 봤잖아요.
저 대리님 믿어요. 서류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바로 퇴근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팀장을 보며 멍-해 있는 정희 씨.
그런 정희 씨를 보며 팀장이 한 마디 덧붙인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면서요, 대리님?"
상담실을 나가는 팀장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정희 씨.
5분이나 채 지났을까, 다시 열리는 상담실.
탕비실의 육아 동지 둘이 팀장한테 오더 받았다며,
가방과 핸드폰을 손에 쥐어주며 퇴근을 채근한다.
떠밀리듯 퇴근하며 수많은 상념들로 가득 찬 자신을
되짚어 보는 정희 씨.
오롯이 내 마음을 말해 본 게 언제였을까?
.
왜 말하지 않고서 들어주지 않는 걸 탓했을까?
.
나 여태... 뭘 하고 있었지?
.
.
.
정희 씨는 그 길로 엄마 집에 닭강정을 시켜놓고,
원에 있는 두 딸을 일찍 데리고 나와 엄마 집으로 향한다.
"엄마-"
"어머, 얘 너 왜 이 시간에 퇴근해?"
"그렇게 됐어. 할 얘기도 있어서 겸사겸사 들렸어."
"할 얘기? 뭔 얘긴데? 일단 들어와. 춥다. 애들 감기 들어."
정희 씨 품에서 할머니에게 자길 안으라고 양팔 벌리는 둘찌를 웃으며 안아 들고 들어가는
자신의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과 엄마를 떠올리는 정희 씨.
그런 정희 씨의 손을 잡고 흔드는 첫째 딸.
"엄마 나 추워."
"어어, 엄마가 미안. 들어가자."
첫째와 막 들어가려는데 도착한 닭강정을 받아 들고
들어가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푸는 정희 씨와 그런 정희 씨에게 다가와 도닥이는 정희 씨의 엄마.
"얘, 말을 하지."
"그냥... 엄마 힘든데 애 맡겨놓고 무슨 투정인가 싶어서 참았지."
"으이구, 참을 일도 쌨다. 너 그러다 병 나, 유정엄마야. 너 어릴 때 그렇게 눈치 준 사람 없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눈치를 그렇게 보더라, 꼭?"
"내가? 에이, 그 정돈 아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너 먼젓번에 정우 둘째, 아들이라니까 느이 신랑 눈치 봤으면서."
"그거야... 같이 야구하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느이 신랑이 야구하니? 정우가 야구하니까 축하한단 말 한 걸 가지곤, 혼자 끙끙 앓더니."
"..."
"내가 너네 키우고, 너 애들 봐주면서 느끼는 건데, 애들은 우리가 키우는 대로 크는 게 아니라 스스로 크는 거더라. 내가 아무리 노래 교실 데려갔어도, 유정이 고게 싫었으면 안 따라 불러. 너 아침마다 양말에, 신발에 전쟁이라며."
"그렇긴 하지..."
"걱정 마, 다~ 한 때야. 너는 뭐 남행열차 안 부른 줄 알아?"
"아유, 엄마는. 내가 언제~!"
"간만에 녹화 비디오 틀어주랴? 애들도 있는데?"
"아유 진짜. 몰라. 징글징글해."
"얘, 다 그러고 살아. 넌 너무 잔걱정이 많어."
"난 그러기 싫은 걸 어떡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너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머리 염색 안 해준다고 찔찔 짜더니, 동네 미장원 데려가서 브릿지 넣어주니까 헤실헤실거렸던 거는 기억이나 나냐?"
"아 엄마!!!"
"니 속으로 낳았어도, 니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야. 난들, 유정이가 저렇게 잘 따라 부를 줄 알고 데려갔겠냐? 그리고 피 어디 안 간다. 술 한 잔 들어가면 강서방도 잘 따라 부르드만, 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엄마랑 얘기하면 안 말려든 적이 없어."
"어유, 내가 할 말이다. 너만 징글징글한 줄 알어? 쎄빠지게 다 키워놨드만, 좀 쉬엄쉬엄 살려니까 앓는 소리에 엄마 속을 다 뒤집어 놓고. 너, 내가 애 맡기면 달에 삼백은 달라고 했지? 왜 달라는 지는 좀 키워보니 이제 알겠냐? 일하면서 애 둘 키우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그렇게 결론 없는 이야기만 잔뜩 한 채로,
렌지에 돌린 따끈하고 조금은 퍽퍽해진 닭강정을
엄마가 끓여놓은 된장찌개에 밥반찬 삼아 애들 먼저 먹이고,
남은 밥을 먹어치우는 별 거 없는 하루.
날이 저물지 않은 평일 오후가 마법이었을까.
정희 씨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엄마 말마따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도 어렸을 때는
동네 골목을 주름잡는 골목대장노릇 한다고
엄마 속을 깨나 뒤집어놓긴 했다.
정우가 어디 가서 혼자 지고 오면,
식식 거리며 쫓아가서 뒤집어놓고 오기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내로남불이 틀림없다.
환절기 지나가며 앓는 계절성 우울증에 대해 나오는 걸 보며, 아 혹시 나도 그래서 그런가? 하고 잠이 든 정희 씨 머리맡에 모깨비는 빨갛고 파랗던 색이 섞여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정희 씨의 꿈을 슬쩍 들춰본다.
정희 씨의 꿈은 온통 조용한 순간이 없다. 수제비를 뜯으며 동생 정우와 낄낄 대던 추억, 동네를 주름잡던 꼬마 숙녀 시절, 친구와 토끼풀을 씹어보며 진짜 신맛이 난다고 좋아라 씹고 배탈이 났던 기억, 학교 뒷문에 가까운 문방구에서 팔던 파란색 손바닥 사탕을 연달아 두 개나 먹고 입이 파래져 엄마 거품 물게 했던 날...
그 모든 순간들이 작은 조각들로 남아-
자신을 이루고 있다는 걸 꿈에서나마
어렴풋이 깨달은 정희 씨를 보며,
모깨비는 들췄던 장막을 다시 스르륵 내리고,
조금밖에 못 덮은 이불 끝을 물어 꼼꼼하게 덮어준다.
모깨비는 아직도 다 이해되지 않지만,
지은이 말했던 것 중에 한 가지는 이해했다.
'엄마와 딸은 다른 관계에서는 아무리 알고 싶어도 절대 알 수 없는 이상한 유대감이 있어.'
'어쩌면 네가 뭘 하지 않아도, 그 애기엄마는
그냥 괜찮아질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