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만 더 크고 싶어
모처럼 일찍 퇴근한 저녁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풀잎을 문질러 지나갔다. 습기 먹은 흙냄새와 먼 장대비의 잔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집 방향으로 꺾던 발을 멈추고, 오랫동안 가지 않던 동네 농구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철망 사이로 기울어진 빛이 흘렀고, 삐걱대는 골대와 바닥의 페인트 갈라짐, 사람 대신 차지한 작은 나뭇잎 더미가 방치된 시간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구석에 반쯤 바람 빠진 공이 하나 있었다. 읏차, 허리를 굽혀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 닿는 고무의 거친 결, 손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먼지의 까끌거림. 그 감촉 하나가, 오래전 내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울어대던 시절을 활짝 열었다.
“아… 못 하겠네.”
속삭이자마자 철망 그림자 쪽에서 조그만 검은 실루엣이 반짝했다. 뒤로 보따리를 멘, 실눈을 가진 작은 찹쌀떡 같은 존재가 고개를 까딱였다. 모깨비였다. 내 기억이 문을 열 때마다 나타나, 무거운 것들을 보따리째 안아주는 작고 묵직한 친구.
“그때 넌 키 말고도 많은 걸 키우고 있었지.” 모깨비가 말했다. 입술은 얇은데, 목소리는 묘하게 깊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시선이 공을 스쳤고, 푹 꺼져 있던 표면이 서서히 팽창해 새것처럼 탄력을 되찾았다. 나는 습관처럼 바닥에 한 번 튕겼다. 퉁—. 그 소리 뒤로, 그 시절의 공기와 계절과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봄, 내 교복은 철 지난 옷처럼 자꾸 작아졌다. 3월 공기는 겨울보다 더 차게 느껴졌는데 등엔 땀이 고였다. 165센티, 80킬로그램. 살집은 타이트하게 몸을 감았고, 단추는 늘어난 탄성으로 하루를 버텼다. 벚꽃이 거품처럼 부풀어 운동장 나무에 달라붙던 날, 숨을 조금 더 크게 몰아쉬었다. 체력장 전력질주를 하다가 양말에 모래가 들어갔고, 운동장 모래는 코끝으로도, 발목으로도, 마음속으로도 쏟아져 들어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들은 장난처럼, 그러나 장난이 아닌 어조로 불렀다. “뚱땡이.” “돼지.” 그 말들은 연필 낙서처럼 지워지지 않고 살갗에 눌어붙었다.
저녁, 거울 앞에 오래 섰다. 사탕 문 것처럼 둥근 볼, 제멋대로 자란 앞머리, 힘겹게 버틴 단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 건 키가 아니라 못난 나 자신이었다. 그래도 말은 많았다. 국어는 늘 1등급, 수학도 잘 풀렸다. 영어만은 번번이 6등급이었지만, 말재간 하나로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덕분인지 얕고 넓은 무리의 시큰한 조롱은 멀었고, 소수정예 같은 든든한 친구들이 옆을 지켰다. 진우, 선경. 그 녀석들은 친구였고, 어떤 날은 울타리였고, 때로는 거울이었다.
봄이 미끄러져 초여름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난생처음 고백을 했다. 노트 표지를 한참 긁적이다 눌러쓴 메시지—나 너 좋아해. 점심시간이 끝난 뒤 교실 뒤편에서, 속으로만 수십 번 연습했던 그 말을 꺼냈다. 대답은 짧았다. “미안.” 그 한 마디가 농구공보다 무겁게 가슴을 찍고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교실로 돌아와 여느 때처럼 농담을 했다. 웃음은 얼룩이 되어 남았고, 얼룩은 오래오래 스며들었다.
밤, 창밖 어둠을 보다가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낡은 공 하나. 손바닥을 밀어올라오는 탄력, 손가락 마디에 찍히는 작은 통증. 그때부터였다. 농구공이 내 손을 점령한 때. 열 손가락이 다 삐어도 코트를 떠나지 못했다.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따끔거려도,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터져 진물이 배어 나와도 점프했다. 땅을 밀어 올릴 때마다 굳게 믿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자라고 있을 거라고.
여름은 몸을 더 크게 만들었다. 공기는 무겁고 하늘은 낮게 깔렸다. 물놀이 가자고 친구들이 졸랐다. 강물이 반짝이는 여름이었다. 해녀복 같은 검은 긴소매 래시가드를 챙겼다. 몸을 가리는 옷 없이 출렁거리는 뱃살부터 맨몸을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아침, 엄마가 작은 금반지를 꺼내왔다. 돌잔치 때 받고 팔지 않고 남겨둔, 아기 주먹만 한 상자.
“네가 힘들 때마다 ‘너는 귀하다’라는 말 대신 보여주려고 남겨둔 거야.” 엄마는 금반지를 얇은 실 줄에 꿰어 작은 목걸이로 만들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잃어버릴까 봐 무서우면 집에 놔두고 가고.” 엄마는 늘 이렇게 겁을 준 뒤 슬쩍 허락했다. 겁과 허락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선택을 배웠다. 결국 목에 걸었다. 그 반짝임이 하루쯤은 내 몸을 덜 미워하게 해 줄 것 같았다.
한낮의 강물은 늘어진 하늘을 그대로 비췄다. 물속 모래가 햇빛을 뒤집어 쥐어 흩뿌렸다. 친구들이 앞장서 첨벙거렸다. 물살의 엉덩이가 경쾌했다. 심장박동을 등에 업고 휙—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갑다!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물 표면이 번들거리며 흔들리고, 가슴이 낮게 떨렸다. 그때였다. 목덜미에서 작은 스냅 소리. 앗— 목줄이 끊어졌다. 손이 닿기도 전에 금반지가 물속으로 툭, 가라앉았다. 숨을 멈추고 허우적거렸다. 물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 손끝은 자꾸 허공을 움켜쥐었다. 반지는 금빛 물고기처럼 모래와 함께 떠내려간 것 같았다. 숨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야, 괜찮아?” 진우가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선경이 뒤에서 내 겨드랑이를 끌어올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둘은 알아챘다. 둘은 자꾸만 잠수했다. 모래는 눈을 아프게 했고, 강바닥의 질감은 어디서나 비슷했다. 오후 볕은 점점 누렇게 기울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하나. 흔들리는 눈부심 사이로, 어느 순간 물 너머가 보였다. 강물 위 작은 바위에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보따리를 멘 작은 그림자, 실눈이 크게 뜨인 듯 반짝였다. 바람을 타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I WANT GOLD.”
물 위의 와류처럼 문장이 번졌다. 금? 금반지를 달라는 건가? 아니면 금빛 무언가를 원한다는 뜻? 모래가 흩어지고 햇빛이 반사되는 사이사이, 그 소리가 자꾸 겹쳤다. I WANT GOLD. 입술이 저절로 따라 했다. 손에 쥔 건 동전 하나뿐. 진우가 물 밖에서 외쳤다. “뭐 하냐고!”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동전을 물속으로 떨어뜨렸다. 동그랗게, 아주 작게 퍼지는 물결. 곧 강이 삼켰다.
결국 반지는 찾지 못했다. 해가 지고 물은 급격히 차가워졌다. 햇빛의 금빛은 흐려졌고, 수풀의 숨소리가 코끝을 스쳤다. 아, 엄마한테 뭐라고 말하지.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위 위 작은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여름의 밤은 무거웠다. 창틀에 잔벌레가 부딪히는 소리, 핸드폰 진동, 멀리 개 짖는 소리—섞였다가 사라졌다. 다리가 지독하게 쑤셨다. 뼈가 자라는 속도를 피부가 따라가지 못하는 생지옥. 간지럽고 불타는 느낌. 말 그대로 살이 찢어지는 고통. 어깨와 등, 배와 종아리를 따라 안쪽에서 바깥으로, 관절이 커지는 속도가 표면을 샅샅이 찢었다. 종아리를 감싸 쥐고 몸을 반으로 접어 울다가 지쳐 잠깐 졸았다. 꿈은 강가였다. 바닥의 돌들이 동그란 금엽처럼 빛났다. 발바닥으로 밟으면 금의 모서리가 살짝살짝 찔렸다. 누가 옆에서 놀리듯 외쳤다. I WANT GOLD. 금빛이 충분해질 때까지, 내가 진짜 금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좀 쉬어야 한다고. 쉬지 않으면, 찾으려는 건 늘 눈앞에서 반짝이다가 가라앉을 거라고.
문 앞을 서성이던 기척이 멈추고, 내가 눈만 꿈뻑이고 있을 때 방문이 살짝 열렸다. 누나였다. 아무 말 없이 들어와 엄마가 올려놓고 간 연고를 가져와 다리에 덧발랐다. 약 냄새는 달콤하고 쓴 내가 동시에 났다. 바를 때마다 찌릿—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손놀림은 빠르고 섬세하고 정확했다. 평소의 누나 같지 않았다. 끝나자 누나는 한숨과 함께 탁탁, 두 번 내 손등을 쳤다. 돌아서다 문고리 앞에서 툭 던졌다.
“우리가 아무리 안 친해도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면 세상에 피붙이 너랑 나 둘이야, 멍청아.”
말이 마음에 촘촘히 박혔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누나에게 조금 기대고 있었다. 의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문득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누나는 능글맞다가도 퉁명스럽고, 그러다 다정했다. 그 말투들이 뒤섞여 끈처럼 묶였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생선 가시를 말끔히 발라 내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아빠는 차마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밥상에서야 마음을 보이는 사람. 그날따라 가시는 더 깨끗했다. 눈가에는 밤샘의 실핏줄이 붉었다. 엄마는 “그 강은 흐름이 빨라 잃어버리면 찾기 힘들다”면서도 “내가 그걸 왜 꺼내줬을까, 내 손 모가지”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장을 보러 나가 그 반지와 닮은 작은 펜던트를 사 왔다. 진짜 금은 아니었지만 모양이 비슷했다. “어차피 엄마 걱정이 부적이야. 이거 해.” 엄마는 아이 어르는 말투를 감추려 애쓰는 어른이었다.
오후, 나는 혼자 강으로 다시 갔다. 물살은 맑아졌고 햇빛은 낮게 기울었다. 강가는 새들이 한껏 울었고 바람은 햇빛의 가루를 실어왔다. 물에 천천히 발을 담갔다. 금빛은 물 위에도, 물아래에도 있었다. 어제 보았던 그것—모깨비—가 앉아 있었다. 어제보다 가까웠다. 보따리는 더 커 보였고, 실눈은 여전히 반짝였다.
“어제 말했지.” 인사도 생략했다. “I WANT GOLD.”
“돈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니면….” 젖어 무거워진 래시가드를 그러쥐었다.
모깨비는 고개를 저었다. “너의 골드. 황금 시간, 황금빛 햇살, 황금처럼 귀한 숨. 아무거나 하나 던져주면, 내 보따리엔 그게 들어가고, 너는 잃어버린 것의 자리와 닮은 빈 곳을 보게 돼.”
“빈 곳을 본다고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빈 곳을 오래 보면, 모양이 보인다.”
발가락으로 강바닥의 돌을 밀었다. 틈. 작은 틈. 어제 발이 닿던 그쯤, 돌과 돌 사이의 모래가 조금 움푹 들어간 곳. 빈 곳에 눈이 익자 빛의 방향이 달라졌다. 햇빛이 물결에 갈라져 내려올 때 아주 짧게, 둥근 빛이 돌 틈에서 반짝였다. 손가락을 넣었다. 모래가 흘렀고, 손등이 긁혔다. 차갑고 매끈한 것이 지문에 걸렸다.
금반지였다. 어제의 금이 아니라 오늘의 금. 어제는 어제의 금빛이 필요했고, 오늘은 오늘의 금빛이 나를 데려왔다. 손바닥 위에서 작게 반짝이는 원. 햇빛이 붙잡았다가 놓아주는 반짝임. 꽉 쥐자 모깨비가 방긋 웃었다.
“내가 가져가는 건 네가 던진 동전이 아니라, 네가 바치기로 한 황금 같은 몇 시간. 잠. 쉼. 그게 있어야 빈 곳의 모양이 드러나. 네 몸도 마찬가지고.”
무슨 뜻인지 바로는 이해 못 했다. 반지를 찾았다는 안도, 늦은 후회, 엄마에게 뭐라고 말할지에 대한 계산이 엉켰다. 그런데 그 밤, 몸이 녹아내리는 듯 피곤한 상태에서 성장통 시작 이후 처음으로 푹 잠들었다. 통증은 여전히 찾아왔지만 조금 뒤에, 조금 더 얌전하게. 여름밤에도 겨울밤처럼 이불속에서 무릎을 가슴에 붙였다가 풀고, 발목을 천천히 돌렸다. 이불은 작은 바다처럼 출렁거렸고, 그 출렁임은 오래된 자장가 같았다.
가을, 은행잎이 길을 덮었다. 학교 가는 골목은 노란 동전들이 흩뿌려진 시장 같았다. 운동회 날, 햇빛은 거세지 않았고 바람은 조금 사나웠다. 계주 주자로 나갔다. 키는 175, 181, 187… 끝내 189 언저리. 발은 자꾸 앞서 나가려 했고, 무릎은 낯선 무게를 견디느라 삐걱댔다. 바통을 쥐는 순간, 할머니들이 앉아있는 벤치 옆을 스칠 때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바람이 바통 옆면을 마찰했고, 운동장 바닥 작은 돌기가 신발 밑창에 사각사각 긁혔다. 전력으로 달렸다. 잠깐, 아주 잠깐, 내 몸이 사랑스러웠다. 깃털처럼 가볍다기보다 바람의 뿌리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느낌. 결승선을 지나자 곧 무릎이 욱신거렸다. 무엇이든 얻으면 무엇이든 내어주는 계절—가을은 늘 그런 얼굴이었다.
기억 속의 엄마는 가을마다 김장을 했다. 배추 절이는 냄새, 홍고추 갈아 만드는 빨갛고 매운 향. 집 안 전체가 그 향을 뒤집어쓸 때면 공부방에서 영어 단어장을 펼쳤다. 여전히 괴상하고, 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발음들. 국어 문제를 즐겨 풀며 단어 한쪽 끝을 잡아 돌돌 말았다—롤러처럼. 수학 문제를 풀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빈 종이에 농담을 적었다. 농담은 늘 우울의 늪에서 날 건져 올렸고, 가끔은 놓아주기도 했다. 누나가 그 종이를 들고 와 “이거 웃기네” 하고는 가장 아픈 문장을 손가락으로 눌러 읽었다. “사람은 각자 때가 있어. 너는 지금 네 때를 살고 있어?” 나도 모르게 건조하게 대답했다. “글쎄.” 누나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방을 나가다 말끝을 덧붙였다. “네가 쓴 말, 나 절반은 이해해.” “글쎄…” 어쩐지 누나에게 살갑게 굴기엔 아직 멋쩍었다.
겨울이 왔다. 바람은 유리창에 하얀 김을 입혔다가 갉아먹었다. 기초부터 얼어붙는 계절. 통증은 밤 열 시쯤부터 시작해 새벽 세 시에 절정. 이불속에서 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폈다. 몸은 꿈틀거리는 작은 동굴. 살이 찢어지는 느낌. 피부가 뼈를 따라잡으려다 자꾸 넘어지는 느낌. 들이마시는 숨마다 코끝이 얼얼했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베어 들었다. 이불 주름 위로 달빛이 얇게 걸렸다. 그때마다 모래 속 금반지의 표면이 떠올랐다. 매끈하고 차갑고 단단한, 그러나 작은 원. 고통은 그 반지를 움켜쥐던 지문처럼 선명했다.
엄마는 새벽에도 일어나 약을 챙겼다. 손등에는 설거지로 생긴 작은 갈라짐이 줄을 이었다. 누나는 문을 열고 들어와 연고를 바르고, “나도 자야 하거든. 이 웬수야” 하면서도 발바닥을 따뜻한 수건으로 싸매주었다. 아침이면 아빠는 더 조용해졌다. 말수가 줄어들수록 생선 가시를 발라내는 젓가락질은 더 정교해졌다. 어느 겨울날, 젓가락 두 개를 교차해 아주 작은 가시 하나까지 잡아내는 걸 보고 이상하게 울음이 북받쳤다. ‘아빠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그 손놀림은 밤새 내 방에 머물다 간 사람의 손놀림 같았다.
겨울의 끝자락, 아무렇지 않은 척 용기 내어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나 사실 누나가 연고 발라줄 때 진짜 고맙거든.” 누나는 곁눈질하다 코웃음을 쳤다. “영어 성적부터 올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편지로.” 퉁명스러움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성장통이 한 고비 지난 오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작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연필로 삐뚤빼뚤—‘우리 집 막내에게’. 누나의 편지였다.
‘네가 자라는 동안 우리도 자랐고, 네가 아픈 동안 나도 아팠다. 근데 같이 지나가면, 나중에 이게 다 황금처럼 웃을 수 있는 이야기될 거다. 네 성장통은 네 거. 내 건 내 거. 우리 둘은 같이 견뎌서 같이 늙자.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면 세상에 피붙이 너랑 나 둘이니까, 이 멍청아.’
봉투를 닫으며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아픈 새벽에 누나가 종종 내뱉던 말들이었지만 활자로 보니 집의 기둥처럼 굵고 단단했다.
시간은 생장점을 밀어 올리듯 나를 밀었다. 키는 189에 완전히 닿았다. 거울 속 눈높이가 달라졌다. 소매는 껑충 짧아졌고, 어깨뼈가 도드라졌다. 별명도 바뀌었다. ‘거인.’ ‘농구부.’ 하지만 커진 몸은 또 다른 불편들을 데려왔다. 버스 좌석은 늘 작았고, 마을버스의 뚜껑 열리는 천장 부분에 머리를 넣어야 부딪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려야 했다. 책상 밑에는 무릎이 걸렸고, 어떤 문턱은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일 만큼 세게 부딪혔다.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네—속으로 중얼거렸다. 손끝은 여전히 농구공을 찾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덜 찾게 됐다. 그게 다였다.
고3 겨울, 목도리로 입을 덮고 숨을 몰아쉬며 학교를 오가던 날들이 지나고, 대학은 멀고 술집은 또 가까웠다. 영어 성적은 끝끝내 확 오르지 않았지만 수학 논술 고사로 이름난 K대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덜 주눅 들게 되었고,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디딤돌을 몇 개 더 찾았다. 늘 다급해 초조했던 시간들이 조금 덜 급해졌다. 아주 조금.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었다.
2025년, 서른셋 인 나는 공을 세 번 튕기고 멈췄다. 어두워진 공원등이 전체를 희끄무레하게 밝히고, 매미의 마지막 소리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땀은 거의 나지 않았지만 손바닥은 약간 촉촉했다. 모깨비가 철망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보따리는 그때 이후 더 커지지 않았지만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어린 날 잃어버린 반지가 들어 있을 것 같은 둥근 모서리, 겨울 이불의 모난 자락, 가을 은행잎의 얇은 모서리, 여름 강물의 둥근 입자—모두가 조금씩 들어 있었다.
“그때 강에서 반지 찾았던 거, 기억나?” 모깨비가 물었다.
“기억나.” 웃음이 났다. “네가 그 이상한 영어를 외치던 것도.”
“I WANT GOLD.” 모깨비가 장난스럽게 반복했다. 발음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았지만 뜻은 더 선명했다. “그때 네가 나한테 준 건 동전이 아니었어. 황금 같은 조금의 잠, 조금의 쉼, 나를 믿는 약간의 시간. 그게 있어서 빈 곳이 모양을 드러냈지.”
“이상하다. 살면서 내가 제일 못 한 게 쉼이었는데.” 중얼거렸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게 돼버린 성장기였지. 그게 내 고집이고 내 방식이었고. 그런데 결국 쉬니까 찾을 수 있었구나. 쉬니까, 빈 곳의 모양이 보였구나.”
모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당길 수도, 미룰 수도 없지. 각자 때가 있을 뿐이야. 너는 네 때를 통과했고, 그 통증은 네 안에 새로운 그릇을 만들었어. 지금 너는 그 그릇을 쓰고 있고. 아직도 어려워? 당연하지. 어려우니까 사는 거야.”
“누나가 요즘도 전화로 그 얘기해.” 나는 웃었다. “‘야, 너 그때처럼 멍청하게 굴지 마라. 인생 짧아.’ 말투는 여전해.”
“여전하니까 더 귀하지.” 모깨비가 보따리를 뒤적였다. 작은 반짝임이 손끝에 걸렸다. 둥근 금색 단추 같은 것. 반지와 닮았지만 정확히 같진 않은 금빛. “이건 반지가 아니라 네가 보태서 만든 다른 금빛들이야. 엄마 손등에 난 작은 갈라짐, 아빠 젓가락 끝에서 떨어진 마지막 가시, 누나의 퉁명스러운 편지, 진우와 선경의 고함. 그게 다 네 금이야. 너의 골드.”
“I WANT GOLD.” 이번엔 내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내가 말할게. 내 금을 내가 갖고 싶다. 내가 내 금을 챙기고 싶다. 잠, 쉼,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 사람들, 이 공.”
모깨비가 활짝 웃었다. “그래. 안내도 되고, 빼앗기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증명하느라 전부 쓰지 않아도 돼. 황금처럼 귀한 건 네가 정하는 거니까.”
골대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처럼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에 있었다. 공을 들어 슛. 철망에 스치며 깔끔하지 않게 들어갔다. 퉁— 쇳소리에 가까운 울림이 농구장 위로 퍼졌다. 그 소리는 여름 강물 바닥에서 반지가 “찰칵” 하고 지문에 걸리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빈 곳에 걸리는 금속의 감촉. 어쩌면 그때부터 지금의 나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밥 대신 산책을 했다고, 은행잎이 벌써 조금 노랗다고, 그 노란 걸 치울 땐 귀찮아도 막상 보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빠는 같은 공간에 있었는지 “전화 바꿔줘 봐라” 하더니, 맛있는 꽁치가 들어왔다며 다음에 오면 가시 바르는 법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누나는 자고 있을 시간이어서 전화하지 않았다. 조금 뒤 메시지. ‘꿈에서 비둘기 밥 주다가 네 중학교 체육복 입은 너 봄. 근데 네가 비둘기 대신 공한테 밥 주더라. 웃겼는데, 왠지 뭉클. 이상.’
길가 은행잎을 밟았다. 사각, 사각. 금속성의 가을. 발자국마다 작은 동전이 사라지는 소리. 열아홉의 여름을 스치는 겨울 이불 소리가 가을길 위에서 났다. 계절은 늘 그렇듯 서로의 옷을 빌려 입는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방 안 공기가 낮보다 차분했다. 책상 앞에 앉아 과거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경수야. 네가 울던 밤을 기억해. 겨울 이불속에서 벌레처럼 몸을 말던 자세를 기억해. 강에서 금반지를 잃어버리고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던 너의 움직임을 기억해. 너는 그때 금을 찾았고, 아니 사실은 금이 너를 찾았고, 그 이후로 너는 너의 금조각을 조금씩 모으고 있어. 너의 금조각은 돈이 아니라, 너의 시간, 너의 잠, 너의 숨, 너의 사람들, 너의 말, 너의 공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너의 때는 늘 네 때였고, 지금도 네 때다.’
봉투를 닫으며 생각했다. 키가 크든 작든, 통증이 물결처럼 지나가든 머물든,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 성장의 통증은 뾰족한 부분을 조금씩 둥글게 만드는 과정일 뿐. 그 앞에 무릎 꿇지도, 다리를 쭉 뻗지도 못한 채—적당히 웅크리고, 적당히 펴면서—사람들은 저마다의 밤을 건넌다. 내가 건넜던 밤들이 모여 금이 되었다. 그 금은 자랑을 위해 만든 주괴가 아니라,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반지 같은 것. 손가락에 끼우면 손의 온도와 날숨의 열기, 누군가의 말과 나무의 그림자가 함께 끼어드는 것.
잠들기 전, 다시 농구장을 떠올렸다. 어둠 속 철망 옆, 보따리를 만지던 작은 존재. 모깨비가 그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주 멀고도 가까운 목소리. 농담처럼, 그러나 농담이 아닌 어조.
“I WANT GOLD.”
이불속에서 미소 지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대답하니, 다리가 덜 아팠다. 마음 안의 동굴이 조금 덜 춥고, 조금 덜 어두웠다. 이불 주름이 작은 물결로 누웠고, 호흡은 차분히 늘어났다. 겨울밤은 길지만, 그 길이가 늘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길다는 건, 그 길이만큼 잠들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창문 너머,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번지는 누런 빛이 천천히 방안을 더듬었다. 천장 모서리, 책상 모서리, 누나의 편지가 든 서랍 손잡이, 엄마가 새로 주었던 걱정부적, 강에서 건진 진짜 금반지, 아빠의 눈물 먹은 젓가락. 모든 것의 모서리가 조금씩 황금빛을 띠었다. 누가 속삭였다. 아니, 마음이 스스로 되뇌었다.
지금 이 순간, 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