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소원 쿠폰
이삿짐 상자는 사람의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든다.
수인은 토요일 이른 오전부터 열어도 열어도 또 나오는 상자에 계속 손을 댔다. 의자 밑에서 굴러나온 버튼, 다 쓴 메모지, 어느 여행지의 입장권. 테이프를 뜯을 때마다 먼지 냄새가 풍겼다. “이게 왜 아직도 있지?”라는 말이 서른 마흔 다섯 번쯤 나올 때였다. 바닥에 탁. 얇은 종이묶음이 떨어졌다.
시선이 아래로 같이 떨어지며 눈앞에 느낌표가 보이는 것처럼 머리 속에 찡! 하고 울림과 함께 추억이 열렸다.
색연필로 칠해진 작은 종이들. 왼쪽 위엔 삐뚤빼뚤 “소원 쿠폰”이라고 적혀 있었다.
쿠폰 1 : 아이스크림 사주기.
쿠폰 2 : 욕 대신 칭찬 10번 해주기.
쿠폰 3 : 울 때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기.
쿠폰 4 : 비밀 이야기 들어주기(반드시 비밀 지키기).
쿠폰 5 : 시험 끝나면 떡볶이 먹으러 가기.
종이마다 옛날 크레파스 냄새가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체육대회 날,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가 건네받았던 묶음이었다. 친구 은하가 공책에서 조심스럽게 뜯어 만든… 그날의 햇빛과, 땀이 밴 운동장 냄새가 종이 끝에 대롱대롱 달라붙어 있었다.
수인은 웃음이 났다.
“뭐야, 이 귀여운 계약서들.”
그러다 휴대폰 화면을 켜서 은하의 이름을 찾았다. 연락처는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대화창은 오래전의 “잘 지내?”에서 멈춰 있었다. 그 이후로 각자의 시간은 얼룩처럼 번져 나갔다. 학교, 집, 아르바이트, 이직. 사이사이 선이 끊겼고, 다시 이어 붙일 맘을 몇 번이나 가졌지만, 보내기 버튼은 손에 닿지 않았다.
쿠폰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종이가 스르륵 움직였다. 수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종이 위에 작은 그림자가 앉았다. 조그만 몸, 장난기 어린 입꼬리. 실눈 사이로 오래된 돌멩이 같은 눈빛이 빛났다.
“이거, 아직 유효하네?”
모깨비였다. 아기 손바닥만 한 존재가 쿠폰을 툭툭 치며 웃었다.
“유효기간 지난 지 15년은 넘었을 걸?” 수인이 중얼거렸다.
“약속은 유통기한이 없지. 그냥 서랍 속에서 잠깐 겨울잠을 자는 것뿐.” 모깨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도와주기엔 ‘규칙’이 있지. 해결엔 대가가 필요하거든. And~ I WANT GOLD.”
영어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의 눈썹이 귀엽게 들썩였다. 수인은 피식 웃었다.
“금? …? 다들 현금 안 갖고 다니지 않나…”
“돈 말고~ 네게 있는 금.” 모깨비는 쿠폰 묶음에서 한 장을 쓱 빼들었다.
“이건 어때. ‘네가 울 때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기.’ 이 약속, 오래됐는데도 반짝이네.”
수인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목 뒤가 찌릿해졌다. 체육대회 날, 혼자 울던 화장실 칸. 하얀 신발 끈. 문 아래로 들어온 작은 그림자. 말없이 옆에 앉아 있던 은하의 손등. 그때의 수인은 처음 알았다. 누군가 내 곁에 있어주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라는 걸.
“그날, 금을 받았구나.” 모깨비가 말했다.
“금이요?”
“스스로가 처음 위로받았다고 확신한 기억. 그게 금이지.”
모깨비는 쿠폰을 손끝으로 들어 햇빛에 비췄다. 낡은 종이 위에 금빛 가루 같은 것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쪼그려 앉아 종이를 접었다 폈다 하며 신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 규칙을 만들자. 하나, 이 쿠폰은 아직 유효하다. 둘, 금은 묻어두면 녹슬고, 쓰면 빛난다. 셋, 용기는 언제나 대가로 인정된다.”
“용기가 대가라고요?” 수인이 물었다.
“응.” 모깨비가 씩 웃었다. “오늘, 연락해.”
수인은 망설였다. 십몇 년이면, 사람도 계절도 다 바뀐다. 문장을 쓰는 손가락이 얼어붙은 듯, 느리게 움직였다. 모깨비가 옆에서 툭툭 등을 쳤다.
“자, 너는 엔터를 누를 수 있어.”
메시지창에 글자가 찍혔다.
ㅡ 혹시 기억나? 네가 준 소원 쿠폰. 나 아직 갖고 있어.
톡창에 점 세 개가 깜빡였다. 오래된 시간 사이로 아주 얇은 금빛 선이 타고 들어오는 듯했다.
> 헐?! 그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
ㅡ 나 사실… 그때 만든 거 몇 장 집에 남아 있음. 웃기지ㅋㅋㅋㅋ
> 나도 웃기다. 그때 약속, 아직 유효해?
잠깐의 정적. 그리고 금방, 답장이 왔다.
> 유효. 이번 주나 다음 주, 내가 떡볶이 쿠폰 쓸래!!!
수인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에 올라온 힘이 스르르 풀렸다. 모깨비가 냉장고 문짝에 붙어있던 자석을 타고 내려와, 손바닥만 한 종이를 흔들었다.
“좋아. 첫 관문 통과. 이제 대가.”
“또요?”
“응, 이번엔 진짜.”
모깨비가 엄숙하게 식탁 위에 올라섰다.
“오늘 밤, 너는 너에게 소원 쿠폰을 한 장 써서 내게 줘. 그게 금이야.”
“나에게…?”
“남한테만 쿠폰 쓰지 말고. 너 자신에게도 써. 쉬운 거 말고, 꼭 필요한 거 하나.”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깨비는 기분이 좋아진 듯 식탁 위를 통통 튀더니, 쿠폰 묶음을 곱게 모아 작은 보따리로 만들었다. 종이끈으로 매듭을 묶으며 중얼거렸다.
“내일, 보따리 한 번 풀어보자.”
약속한 날, 오래된 떡볶이 집 앞.
“탕탕탕탕-”
가게 안에서 나는 요리의 소음이 맛있게 들려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스테인리스 접시의 긁힌 자국, 벽에 붙은 연예인 싸인. 정신없이 추억이 날아오는 그 사이 테이블엔 은하가 먼저 와 앉아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데, 십몇 년이라는 시간은 1초 만에 사라질만큼 얇았다. 둘은 동시에 웃었다.
“안 늙었네.”
“너도.”
“거짓말이 제법이다?”
“선생님, 소원 쿠폰부터 꺼내세요.” 은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수인은 가방에서 낡은 묶음을 꺼냈다. 은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와… 진짜 있네. 그때 내가 그렸던 사자도 있어.”
사자라고 하기엔 찌그러진 개… 같았지만, 은하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말을 줄였다. 타이밍 좋게 떡볶이가 나왔다. 매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 사실 그때 네가 울 때 아무 말도 못 했잖아.”
은하가 접시 위를 보며 말했다. “옆에 있는 것밖에.”
“그게, 제일 좋았어.” 수인은 천천히 말했다. “그게 금이었어.”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금?”
“응. 나한텐 그랬어.”
은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 나 오늘 부자 된 건가?”
“쿠폰 두 장 쓰면 억만장자.”
“좋아. 일단 떡볶이 사주기 쿠폰 사용.”
은하가 계산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칭찬 열 번. 그건 네가 해.”
수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건 너도 해야 되는 거 아냐?”
“규칙은 내 마음.”
“나쁜 지지배.”
“나는 선량한 악당이거든?”
은하가 눈을 찡긋했다.
둘은 엉성하게 서로를 칭찬했다.
“머리카락이 오늘은 윤기가 난다.”
“너는 예전보다 김말이를 잘 자른다.”
“글쎄, 눈웃음이… 좀 더 눈웃음같다.”
말도 안 되는 칭찬들이 쌓일수록, 어딘가가 풀리는 듯했는데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나 그때, 너랑 멀어진 이유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어.”
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소한 오해, 바쁜 척, 자존심.”
“내가 사과할 게 더 많다. 연락 두절하고, 못 본 척하고.”
“지금 하면 되잖아.” 수인이 말했다.
“지금 하자.” 은하가 이어받듯이 말했다.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 종이컵을 건드렸다. 모깨비였다. 설탕 통 위에 통통한 몸체를 부풀리고 앉아, 동글동글 움직이며 몸을 최대한 둥그렇게 모았다.
“아주 좋다. 아주아주.”
그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기 보여?” 수인이 슬쩍 물었다.
“응?” 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설탕 통에.”
“작은 찹쌀떡?.”
“너도 보이네.”
“응. 근데 찹쌀떡은 갑자기 왜?”
(수인은 이미 모깨비에게 들었었다. 모두가 모깨비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멈춘 듯 모깨비와 수인만 색채가 유지되고, 모두가 흑백으로 흐릿해지며 멈췄다. 모깨비는 눈썹을 까딱 위로 들어올렸다.
“잘 보는 사람, 잘 안 보이는 사람. 다 괜찮아.”
그러더니 몸을 움직여 뿔로 허공을 꿰매듯 움직였다. 금빛 실 같은 게 한 올, 테이블 위를 스르르 지나갔다. 그 실은 수인의 손등과 은하의 팔꿈치 사이를 조용히 지나가며 작은 매듭을 만들었다.
“대가.”
모깨비가 수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수인은 준비해 온 작은 봉투를 꺼냈다. 하얀 종이 한 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
“내가 나에게 쓴 소원 쿠폰.”
모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줘.”
수인은 조용히 펼쳤다. 아주 짧은 네 줄이었다.
ㅡ 오늘 밤, 내 이야기를 20줄 쓴다.
ㅡ 나에게 친절하게 말한다.
ㅡ 못한 일보다 한 일을 먼저 적는다.
ㅡ 용기와 노력을 잊지 말기.
“좋아.” 모깨비가 두 손으로 쿠폰을 들어 무게를 재는 시늉을 하더니, 수인의 손바닥에 다시 올려놓았다.
“농담. 금은 네가 쓰는 거지 내가 가져가는 게 아니야. 대신 약속 하나.”
“또요?”
“응. 오늘 너 자신에게 쓴 쿠폰처럼, 한 장 더 만들어. 다른 누군가에게 줄 거야. 유효기간 없는 약속이 세상에 많아지도록.”
수인은 모두의 색채가 돌아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은하가 물었다.
“왜 갑자기 고개를 끄덕여?”
“그냥. 좋은 생각을 했어.”
“좋은 생각은 떡볶이를 추가로 시키는 거지.”
“맵게 먹고 울면 네가 옆에 있어줄 거야?”
“쿠폰 있잖아.” 은하가 씩 웃었다.
“유효.”
저녁 햇살이 떡볶이 집 창문으로 길게 누웠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나뉘었다. 테이블 위엔 새 쿠폰이 한 장 더 놓였다. “비밀 이야기 들어주기(반드시 지키기).” 은하가 쓴 글씨였다. 수인은 그 옆에 살짝 덧붙였다. “유효기간: 없음.”
돌아오는 길,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조금 달라 보였다.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시간들이 오늘의 손으로 천천히 깨어났다. 집에 도착해 수인은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 첫 줄에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준 약속대로, 스무 줄을 넘겼다. 못한 일 대신 한 일을 먼저 적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한 줄 한 줄이 쌓일수록 마음의 온도가 달라졌다.
모깨비는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귓불만한 바람이 커튼을 살짝 들어올렸다.
“충분해?” 수인이 물었다.
모깨비가 빙긋 웃었다. “충분하네.”
수인은 남은 쿠폰 묶음을 다시 묶었다. 종이끈으로 작은 매듭을 만들었다. 보따리 같았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새 메시지를 보냈다.
ㅡ 다음 주, 칭찬 10번 더. 유효?
ㅡ 유효. 숫자는 늘릴 수 있음. 무제한으로.
답장을 본 수인은 웃었다. 모깨비가 손바닥으로 작은 금빛을 툭툭 두드렸다.
“오늘의 문장, 적어볼래?”
수인은 노트 맨 아래에 한 줄을 썼다.
ㅡ 우정은 주소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p.s - 우표는 유통기한(아, 유효기간!) 없음.
모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디까지나 매듭만 보여줄 뿐이야. 완성은 네가 했어.”
그는 커튼 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얇은 물결처럼 사라졌다. 방 안엔 종이와 잉크 냄새가 은은히 남았다. 수인은 쿠폰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번엔 자신이 누군가에게 줄 쿠폰이었다.
ㅡ 당신이 울 때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기.
유효기간: 없음.
그 종이를 살짝 접어 보따리 속에 넣었다. 언젠가 필요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이 작은 종이는 또 한 번 금처럼 반짝일 것이다.
머리 위가 가볍고, 마음 한켠이 단단했다.
그리고 아주 얇은 금빛 실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조용히 이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