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이야기

모든 걸 저장하는 사람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람 대신 종이 냄새가 들어왔다.
한태윤은 발끝으로 신문 더미를 밀어 안쪽으로 길을 냈다. 신문은 오래된 잉크 냄새를 내며 바스락거렸다. 우편함에서 튀어나온 광고지가 문턱을 넘어 눈처럼 쌓여 있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무겁게 방 안에 퍼졌다.


그는 라면을 끓일 생각이었다.

냄비는 어디에 있을까. 상자 위에 상자, 그 위에 또 상자. 길쭉한 테이프가 바닥에서 도마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무릎을 굽혀 상자를 옮기는데, 위에서 잡지 더미가 후두둑 무너졌다.


“아…”


한숨을 내쉬며 덮인 잡지 한 권을 들어 뒤표지를 넘겼다. 다은이 유치원 때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종이의 가장자리는 너덜해져 있었고, 사진 속 아이는 두 팔을 번쩍 든 채 금빛 왕관을 쓰고 웃고 있었다. 손글씨로 ‘우리 반 공룡 박사’라고 적힌 컴컴한 매직 글씨. 그 글씨는 윤서의 것이었다.



그는 사진을 잡지 속에 다시 밀어 넣었다. 넣으며 어쩐지 손이 떨렸다. 부엌 전등이 약하게 깜박였다. 냄비를 찾는 일은 더 힘들어졌다. 대신, 라면을 포기하고 컵라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기포트를 찾는데, 포트의 전선은 종이박스 두 개 아래 깔려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틈 사이로 관리사무소 스티커가 비집고 들어왔다.


‘복도 정리 안내문’


글자는 얇고 무심했다. 그는 종이를 접어 상자 틈에 끼웠다. 상자 사이로 종이가 살짝 튀어나와 하얀 혀처럼 흔들렸다.

포트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가느다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이 집, 참… 기억이 많네.”


태윤은 허리를 폈다. 아무도 없었다. 대신, 테이프 커터기 위에 뭔가가 앉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몸, 장난기 어린 입꼬리, 실눈 사이로 오래 묵은 돌멩이 같은 눈빛. 작은 뿔이 반짝였다.


“응?”



“나야.”

작은 존재가 테이프 커터기의 날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모깨비. 기억 수집 전문가 겸, 이야기보따리 매듭쟁이.”


태윤은 말없이 컵라면의 뚜껑을 반만 벗겼다. 뜨거운 물을 붓자 김이 올랐다. 김이 작은 존재를 스치고 지나가자, 모깨비가 재채기를 했다.


“치—! 이 집, 참… 따뜻하네. 근데 숨이 막혀.”
“누구세요.”
“나? 해결사.”


작은 존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해결엔 대가가 필요해. And~ I WANT GOLD.


영어 단어를 말할 때마다 모깨비의 눈썹이 귀엽게 들썩였다. 태윤은 컵라면의 뚜껑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김이 뚜껑 가장자리로 새어 나왔다.


“금은 없어요.”
“돈 말고. 네 안의 금.”


모깨비가 주위를 둘러봤다.


“음… 일단 여기, 왜 이렇게 쌓았는지부터 알려줄래?”


태윤은 대답 대신 컵라면을 한 젓가락 훅 끌어올렸다. 면발이 김과 함께 흔들렸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뜨거운 김에 눈물이 맺혔다. 매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그가 낮게 말했다.

“뭐가?”

“사람, 냄새, 소리. 윤서가 떠나고 나서—”


“버리면, 더 사라질까 봐.”


태윤이 라면을 내려놓고 답을 하자, 모깨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테이프 커터기에서 폴짝 내려와 상자 위로 통통 튀어 올랐다. 작은 발자국이 박스 표면에 가늘게 먼지를 찍었다.


“좋아. 그럼 규칙부터 만들자.” 모깨비가 두 손을 탁탁 털었다. “이런 집에선 규칙이 약.”


“규칙?”


“응. 세 가지 상자만 믿어. 남기기, 기록하기, 내보내기.”


모깨비가 상자 세 개를 툭툭 두드리듯 허공에 그렸다. 공기가 얇게 접히며 네모의 윤곽이 반짝였다.


“첫째, 남기기: 정말 살아 있는 이야기만.

둘째, 기록하기: 사진과 문장.

셋째, 내보내기: 어제의 무게를 내일로 이사시키지 않기.”


“정말 살아 있는 이야기가 뭔데요.”


“네가 손에 쥐었을 때, 냄새가 나고, 체온이 도는 것. ‘그때 나는 여기에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모깨비가 상자 위를 뒤적거리다가 작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마트 영수증. 그 위에는 삐뚤한 글씨로 덧적여 있었다. ‘간장, 두부, 초코우유(다은 거)’.
“이건 살아 있네.” 모깨비가 말했다. “여기, 사랑이 적혀 있어.”

태윤은 종이를 받아들었다. 영수증의 열이 꺼진 지 오래였지만, ‘초코우유’라는 글자에서 이상하게 달큰한 냄새가 났다. 윤서의 글씨였다. 평일 밤, 아이가 울어 초코우유를 사러 나갔던 날들. 돌아오던 발걸음의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 위로 다은의 웃음이 얹히던 소리도.

“그건 남겨.” 모깨비가 ‘남기기’ 상자에 보이지 않는 구멍을 뚫어 종이를 툭 떨어뜨렸다. 종이는 공기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대신 그의 손끝과 태윤의 손끝 사이에 얇은 금빛 실이 잠깐 떨렸다가 풀렸다.

“둘째, 기록하기.” 모깨비가 오래된 잡지 더미에서 낡은 리본을 꺼냈다. 그 리본은 입학식 때 다은의 머리에 매달았던 것이었다.

“이건…”
“사진 찍어. 그리고 문장 하나.”
“무슨 문장.”
“그때의 너한테 편지. 예를 들어, ‘그날 너는 매듭을 서툴게 묶었고, 그래서 더 예뻤다.’ 같은 거.”


태윤은 핸드폰을 들어 리본을 찍었다. 화면 속 리본이 빛났다. 그는 메모장에 천천히 문장을 적었다. ‘리본을 묶느라 서툴던 손, 아이는 기다려줬다.’ 적는 동안, 마음 어딘가의 굳은살이 얇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셋째, 내보내기.” 모깨비가 커다란 종이보따리를 펼쳤다.

“고장 난 리모컨, 설명서 없는 케이블, 같은 사진의 복사본 세 장… 이런 아이들은 네 대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

“근데…” 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맞아.” 모깨비가 씩 웃었다. “우린 버리는 게 아니야. 돌려보내는 거야. 세상으로. 혹은 너의 어제로.”


모깨비는 손바닥만 한 금색 바늘과 실을 꺼내 허공에 대고 매만졌다. 빛이 실 따라 얇게 뻗어 방 안의 어지러움을 바느질하듯 꿰맸다. 매뭇한 공기에서 매듭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대가는요.” 태윤이 물었다.


“현관 한 평.” 모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그 한 평은 너에게서 나에게 주는 금. 빈자리를 내게 줘.”

“빈자리….” 태윤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모서리가 입천장에 닿았다.
“무서우면 내가 옆에 있을게.” 모깨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빈자리에는 실은 공기가 들어오거든. 숨 쉴 공기.”



현관 한 평은 생각보다 넓었다. 하나, 둘, 셋. 상자들을 밀어내며 숫자를 세었다. 오래된 전단지 묶음, 어디서 나온지 모를 양말 짝, 깨진 머그컵. ‘기록하기’ 상자에 사진을 찍고 한 줄씩 적어 넣었다.

— 오늘, 깨진 머그컵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 사진 두 장은 어제의 나를 충분히 증명한다.
— 우리 집은 숨을 쉴 수 있다.


보따리는 점점 살이 쪘다. 종이의 살, 먼지의 살, 미련의 살. 태윤은 땀을 훔치면서도 보따리의 매듭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묶음의 매듭은 의외로 꽃 모양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은이 들어왔다. 교복 치맛자락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아이는 현관을 보고 멈칫했다.


“아빠, 뭐 해?”
“현관 한 평.”
“왜?”
“숨 쉬려고.”


태윤이 웃었다. “같이 할래?”


다은은 잠깐 엄마의 사진이 걸린 벽을 보고 다시 현관을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안에는 초등학교 때 만든 도자기 접시가 들어 있었다. 접시의 표면에는 삐뚤빼뚤한 해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태윤이 말했다.
“두자.” 다은이 단호히 말했다.


“남기기.” 모깨비가 조용히 웃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기기’ 상자를 다시 열었다. 접시는 소리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다은이 물었다. “엄마 냄새 나는 거, 있어?”
태윤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서랍을 열어 한 장의 쪽지를 꺼냈다. ‘다은이 장화 꼭 챙기기. 비 온다.’ 윤서의 글씨였다. 글씨 위에 아주 조금, 비누 냄새가 아직 있었다.

다은은 쪽지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눈이 조금 붉어졌다. “이건… 남기기.”
“응.”
“그리고…” 다은이 보따리를 가리켰다. “이건 내보내기.”

둘은 말없이 움직였다. 보따리 위에 손을 얹고, 매듭을 한 번 더 조였다. 모깨비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들이치며 보따리 위의 먼지들을 훑어 갔다.

“좋아.” 모깨비가 속삭였다. “이제 한 평.”

그들은 현관 바닥을 젖은 걸레로 두어번, 마른 걸레로 서너번 쯤 훔쳐냈다. 바닥의 색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태윤은 신발장을 정리했다. 한 켤레씩, 양쪽이 함께 있는지 확인하며. 다은이 웃었다.
“아빠, 우리 집 현관… 원래 이렇게 넓었어?”
“응. 몰랐지.”
“내 친구 불러도 돼?”
태윤은 잠깐 멈췄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불러.”


모깨비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금빛 실이 현관 구석과 구석을 가늘게 잇더니, 가운데에 조그만 매듭을 만들었다. 매듭은 볼록했고, 빛은 얇았다.

“대가.” 모깨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태윤은 무엇을 내밀어야 하는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현관 바닥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었다. 한 평의 차가운 감촉.
“여기요.”
모깨비가 그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개었다. 오래된 돌 같은 따뜻함이 내려왔다.

“충분해.” 모깨비가 말했다. “이제 너도, 조금 덜 저장해도 돼.”

“근데… 그게 잘 될까요?”
“문장.” 모깨비가 미소 지었다. “문장은 상자를 가볍게 해.”


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작은 공책 하나를 꺼냈다. 제목을 적었다.


‘내보낸 것들의 목록’.


그리고 아래에 문장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 설명서 없는 리모컨: TV는 여전히 켜진다.
— 겹겹의 전단지: 오늘의 바람이 더 가볍다.
— 엄마의 쪽지는 남았다. 나는 그걸로 내일을 기억한다.


다은은 그의 옆에서 색연필로 현관을 그렸다. 빈 현관이 이상하게 따뜻해 보였다. 아이는 그림 위에 작은 사람을 하나 더 그렸다. 손바닥만 한 키, 작은 뿔, 웃는 눈.

“아빠, 얘 누구 같아?”
“찹쌀떡.”
둘은 같이 웃었다.


며칠 뒤, 관리사무소의 종이가 다시 왔다.


‘복도 정리 완료 확인’.


태윤은 사인하는 대신, 문고리에 작은 초록색 화분을 걸었다.

현관 한 평에 화분 하나. 그 작은 녹색이 집 안으로 숨을 밀어 넣었다.


퇴근길에 장을 보며 그는 메모를 썼다. ‘간장, 두부, 초코우유(다은 거)’. 종이를 접어 지갑에 넣는 손이 조금 가벼웠다. 주머니에서 오래된 영수증이 쏟아질 때, 그는 그중 몇 장을 ‘기록하기’ 상자에 사진으로 남기고 다른 것들은 보따리로 보냈다. 보따리는 이번엔 재활용함으로 갔다. 떠나는 것들의 뒤통수에는 감사가 붙었다.

집에 돌아오자 현관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바닥이 반짝거렸다. 다은이 친구를 데려오며 큰 소리로 웃었다. 누군가의 웃음이 집의 벽에 닿아 튕겨 나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소리는 빈자리를 무서워하던 그의 마음을 톡톡 두드렸다.

모깨비는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커튼을 들어 올리는 바람이 귓불만큼 얇았다.
“충분해?” 태윤이 물었다.
모깨비가 빙긋 웃었다. “충분하네.”

“대가는… 더 있어요?”
“있지.” 모깨비가 손바닥을 펼쳤다. “이번엔 진짜 금. 네가 나한테 주는 게 아니라, 네가 너한테 주는 것.”

“뭔데요.”
“일요일 30분. ‘내보낸 것들의 목록’ 쓰기.”
태윤은 웃었다. “그건 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약속.” 모깨비가 눈썹을 까딱했다. “유효기간 없음.”

그는 공책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 오늘 나는 버리지 않았다. 대신,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에게 돌아왔다.


모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원래 해결사니까.

그런데 사실, 해결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매듭만 보여줄 뿐.”


커튼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모깨비는 커튼 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얇은 물속으로 사라지듯 사라졌다. 방 안엔 종이와 비누 냄새가 은은히 남았다. 태윤은 현관 한 평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빈자리 위로, 아주 얇은 금빛 실이 오늘과 내일을 조용히 이어 주고 있었다.

문밖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그는 문손잡이를 가만히 쥐었다 풀었다. 손바닥에 남은 감촉이 따뜻했다. 다은이 부르는 소리가 안쪽에서 울렸다.



“아빠! 초코우유—”
“있다!” 태윤이 대답했다.


그는 웃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집이 가볍게 숨 쉬었다. 그리고, 저장하지 않은 오늘이 조용히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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