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중독자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선경이요.”
“나이는요.”
“서른일곱 살이요.”
“현재 이곳에 와서 서류를 쓰는 이유를 아십니까.”
“네. …저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검은 볼펜이 접수대 위에서 딸깍 소리를 냈다.
그 한 번의 소리만으로도 심장은 두어 번 더 빨리 뛰었다.
서류를 반쯤 채우고 밖으로 나오자, 휴대폰 알림이 떴다.
‘오늘의 택배가 도착했어요!’
그 문자에 표시된 물건은, 분홍 리본과 작은 진주가 박힌 머리핀.
누가 봐도 어린아이에게 더 잘 어울릴 그것.
선경의 방은 머리핀이 지도처럼 덮여 있다.
플라스틱 서랍, 책상 모서리, 화장대 앞, 침대 머리맡, 심지어 전자레인지 위까지.
종이봉투와 비닐봉투는 다르게 바스락거리고,
각기 다른 바스락거림이 방 안에서 파도처럼 겹친다.
그녀는 개발자다.
줌 회의, 메일, 깃 푸시. 화면 속 얼굴은 네모난 칸에 들어오고,
그녀의 방은 칸 바깥에 남는다.
업데이트 원이 빙글빙글 돌 때면,
그녀는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없는
검정 집게핀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침대에 대충 몸을 던진다.
알고리즘은 기막히게 그녀의 취향을 안다.
‘빈티지 소품 하울’, ‘귀여운 헤어클립 추천’.
클릭, 장바구니, 결제.
하루는 점심을 굶고,
하루는 버스를 한 정거장 걸어 아껴둔 돈이 어딘가로 흘러간다.
'도착했습니다. 배송 완료.'
그녀도 안다. 이게 건강하지 않다는 걸.
그런데 멈춤이라는 버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밤늦게 졸린 눈으로 중학교 졸업앨범을 꺼내 먼지를 털던 순간,
어릴 적 사진 속의 소녀가 머리핀을 꽂고 웃는다.
그때, 방 안의 공기가 잠깐 흔들렸다.
책상 위 종이봉투 하나가 툭 하고 내려앉았다.
“선경.”
그 목소리는,
꿈에서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깨어 있는 중이었다.
탁자 모서리에, 손바닥만 한 아기 모깨비가 앉아 있었다.
얼굴만 보여 장난꾸러기 같고,
실눈 사이 보이는 눈동자는 오래 묵은 돌멩이처럼 깊었다.
그는 몸을 통통 튕기며 요술로 봉투를 들어 올려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왜 계속 사?”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면 좀 나아지는 것 같아서.”
“나아져?”
“조금. 아주 잠깐.”
모깨비는 봉투를 엎었다.
별 모양, 하트 모양, 인조 진주, 벨벳 리본, 금색 집게…
방바닥으로 쏟아진 사소한 반짝임들이
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모깨비가 말했다.
“해결해보자.”
“네?”
“해결엔 대가가 필요해. I WANT GOLD.”
그가 영어로 중얼거릴 때마다 눈썹이 귀엽게 들썩였다.
“어… 현금은 없는데요.”
“돈 말고 금. 네게 있는 금.”
모깨비는 핀들 사이에서 오래되어 바랜 노란색 플라스틱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진, 싼 티 나는 노란색.
유치하다고 느껴져 서랍 가장 뒤에 밀어 둔 그것.
“이거, 기억나?”
“……중학교 입학식 날. 엄마가 바쁘다고 미용실을 못 가서,
학교 앞 문구점에서 천 원 주고 샀던 거예요. 그날은 기분이 이상하게 좋았어요.
아무도 내 머리를 꾸며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쁘다고 느꼈거든요.”
“그게 금이야.” 모깨비가 말했다.
“기쁨을 스스로 발견한 첫 기억.”
그는 바닥에 핀들을 세 무더기로 나눠 쌓기 시작했다.
첫째 더미에는 그녀가 방금 이야기한 노란 핀과,
정말 ‘좋아서’ 샀던 것들이 올라갔다.
둘째 더미에는 마음이 무너질 때 급히 덮개처럼 얹은 것들
—충동, 두려움, 공허의 속도가 묻은 것들.
셋째 더미에는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라는 말로
지연시켜둔, 빚처럼 남은 것들.
“자, 규칙을 만들자.” 모깨비는 의젓한 표정으로 말했다.
“첫째, 금 더미는 남긴다. 둘째, 덮개 더미는 보따리에 묶어 내보낸다. 셋째, 빚 더미는 숫자로 바꾼다.”
“숫자요?”
“응. 이름 없는 감정은 물건이 되고, 이름 붙인 감정은 문장이 돼.
문장은 장바구니를 이겨. 알겠지? 자, 장부를 만들자.”
모깨비는 손가락을 튕겼다.
얇은 공책 한 권과 연필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장부의 첫 페이지에, 선경은 날짜를 적고,
‘오늘의 충동’ 칸과 ‘나를 지키려는 이유’ 칸을 만들었다.
모깨비는 옆에서 엄지손톱만 한 금색 바늘과 실을 꺼내 허공에 대고 매만졌다.
빛이 실 따라 얇게 뻗어 방 안의 어지러움을 바느질하듯 꿰맸다.
“대가는요?”
모깨비가 노란 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거.”
선경은 잠시 멈칫했다.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목구멍에 걸린 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마지못해 그 핀을 내밀었다.
모깨비는 그것을 손에 쥐고 잠깐 무게를 재더니,
다시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농담. 너한테 받고자 하는 금은 네 안에 있어. 대신 약속 하나.”
“약속?”
“노란 핀을 꽂는 날엔 쇼핑 금지. 핀을 빼고 싶을 땐, 사지 말고 써.
사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장부에 적고, 24시간 뒤에도 여전히 원하면, 그때 다시 본다.
그리고… 내일 상담소에 가. 접수대의 볼펜 소리를 두 번 더 듣고 와. 거기서 시작.”
그는 보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덮개 더미의 핀들을 종이보자기 위에 올리고,
끝을 모아 단단히 묶었다. 묶음의 매듭은 의외로 예뻤다.
모깨비는 그 보따리를 그녀 품에 얹고 속삭였다.
“이건 내일 같이 내보내자. 너 대신 떠날 것들.”
그날 밤, 선경은 장부를 채웠다.
‘오늘의 충동: 밤 열한 시, 분홍 리본 핀을 검색함.
나를 지키려는 이유: 외로움이 쏟아질 때 화면을 잠가두고 싶어서.’
문장을 적을수록, 충동의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그 얼굴은 나쁘기만 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살고 싶다’는 표정과 닮아 있었다.
아침. 그녀는 노란 핀을 꽂고 집을 나섰다. 머리 위가 가볍고 단단했다.
상담소 접수대의 볼펜은 어제와 같은 소리로 딸깍 울렸다.
이름, 나이, 주소.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이유’.
상담사는 그녀의 패턴을 물었다. 언제 사고 싶은지, 무엇이 촉발하는지, 산 뒤의 감정은 어떤지.
그녀는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장부 덕분이었다.
상담사는 작은 과제를 냈다.
‘장바구니 보관 24시간’, ‘배송 연기 72시간’, ‘노란 핀의 날엔 카페에서 글 30분’.
그리고 한 문장을 건넸다.
“이건 욕망제어가 아니라 슬픔돌봄이에요.”
집에 돌아오니 모깨비가 이미 와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그는 창문을 열고 보따리를 밖으로 내밀더니, 한참 동안 저 먼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들이쳐, 보따리가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멀어졌다.
“이제 빈자리가 생길 거야.”
“저는… 빈자리가 무서워요. 좀 애 같죠…”
“그 빈자리에 네가 들어오면 돼.”
머쓱해하는 선경에게 모깨비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사람은 다, 자기 자리에서 산다.”
며칠 뒤, 그녀는 방을 정리했다. 남겨둘 ‘금’ 더미는 작았다. 작지만 단단했다.
모두 합쳐 나이키 운동화 상자 하나에 다 들어갔다.
덮개 더미가 사라진 자리엔 빛이 깔렸다.
빚 더미는 숫자로 바뀌어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에 표가 되었다.
월세, 공과금, 식비, 저축,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 항목.
그 항목은 물건 대신 시간과 몸짓으로 채워졌다. 산책 30분, 스트레칭 10분,
친구에게 안부 메시지, 잘 먹은 점심 사진 한 장, 글쓰기 20줄.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가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충동은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었다.
어느 밤, 알고리즘이 반짝이는 신상품을 밀어 올릴 때,
그녀는 브라우저를 닫고 장부를 열었다.
그 페이지 위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사지 않은 것들의 목록: 나의 내일.’
모깨비는 가끔 나타났다.
장부를 훑어보고, 틀린 맞춤법도 빨간 펜으로 툭,
머리카락에서 노란 핀이 한껏 삐뚤어지면 반듯하게 꽂아주고.
어느 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가.”
“네? 또요?”
“응. 이번엔 진짜. 네가 나한테 금을 줘.”
“무슨 금요?”
모깨비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은 아주 작았고, 오래된 돌처럼 따뜻했다.
“온전한 너의 시간 30분. 오늘 밤. 나 말고 너에게.”
그녀는 웃음이 났다. “그건… 금 맞네요.”
그 30분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대신 썼다. 장부가 아니라, 이야기.
왜 하필 머리핀이었는지, 언제부터 빈자리가 무서웠는지, 누가 떠났고 무엇이 남았는지.
문장을 적다 보니,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또 다른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초등학교 소풍 날, 친구가 생일이라고 나눠 준 스티커. 그날의 햇빛과 도시락 냄새.
그 기억의 이름을 적으며, 그녀는 아주 오래된 허기가 조금 줄어드는 걸 느꼈다.
허리를 조금, 폈다. 굽어있던 자존감이 조금은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쓰고 나서,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는 나를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보기 위해 산다.’
노란 핀을 빼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천천히 다시 머리에 꽂았다.
거울 속 자신이 조금 달라 보였다.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구걸하는 얼굴이 아니라,
자기 삶을 꿰매는 사람의 얼굴.
모깨비는 창가에 앉아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뭐가요?”
“네가 나한테 주려고 했던 금. 이미 네가 쓰고 있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원래 해결사니까. 그런데 사실, 해결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매듭만 보여줄 뿐.”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모깨비는 커튼 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마치 얇은 물속으로 사라지듯 사라졌다.
방 안엔 은은한 바람 냄새만 남았다.
그녀는 장부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날짜를 적고, 오늘의 문장을 하나 더 만들었다.
‘오늘 나는 무언가를 사지 않았다. 대신 나를 조금 더 알았다.’
창밖으로 저녁 빛이 길게 누웠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뤄둔 프로젝트의 첫 파일을 열었다.
커서를 깜박이는 화면 위에, 작은 주석을 하나 남겼다. // 금 더미를 지키는 코드부터 짠다.
노란 핀은 반듯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머리 위가 가볍고 단단했다.
그리고 마음속 어디엔가 아주 얇은 금빛 실이,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조용히 이어주고 있었다.
창가에 걸터앉은 모깨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짧게 웃었다.
“충분하네.”
모깨비도, 보따리도 떠났고, 빈자리는 남았다.
그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건 이제 선경의 몫이다.
//
방년 37세, 이선경. 여전히, 매일 조금씩 크는 중입니다. 이상무.
//
단숨에 어느 건물 모퉁이에 몸을 디딘 모깨비는 뒤돌아 선경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본다.
오늘은 물질의 금을 받지 못했지만, 선경의 시간 30분의 지금을 받았다.
도깨비불처럼 빛이 나며, 설레고 떨림을 갖고 있다.
선경이 죽어도, 이 빛은 그 시점 그대로 살아있는 힘이다.
모깨비는, 이렇게 인간의 서사와 함께 성장한다.
보따리를 묶고, 다시 푼다. 매일 한 번씩, 내일의 버튼 구멍을 만든다.
문득 첫 번째 보따리에서 만나던 ‘꿈을 도둑맞은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의 빈자리와 저 방의 빈자리는 닮아 있었다.
선경도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깐 반짝이는 것들에 맡겨두고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알았으니, 이제는 자주 돌아올 것이다.
저마다의 치료방식도, 의미도, 꿈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르다.
그래서 귀하다. 인간이.
모깨비가 지켜내는 인간이란, 그런 인간들투성이다. 오늘도 한 명 뒤 천 명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