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펍세권에 집을 구했지 뭡니까.
영국으로 시집을 온 후 이사를 한번 했다. 늙은 총각이 살던 집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늘 좀 안타까웠기 때문인데, ‘이 집은 메인 도로에 있고 저 집은 마당이 작고 그 집은 동네가 마음에 안 들고’를 시전 하는 까다로운 남편 마음에 착-드는 집을 구하는 데에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실 그 당시 우리 둘 다 좋아하던 동네가 있었는데 워낙 작기도 하고 인기가 많아 그 동네로 산책을 갈 때면 집을 팔 거면 우리에게 연락을 달라는 쪽지를 마음에 드는 집들의 편지함에 남겨두기도 했었다. 그 동네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여러 개 있는데 몇 개 말해보자면 1. 강과 카날이 있는 언덕 위에 있어 산책에 용의 하고 2. 바스 Bath로 가는 기차역과 버스서비스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3.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컨트리 펍이 무려 세 개나 있고 마지막으로 겹벗꽃 나무로 가득 찬 동네 공원과 우체국을 겸한 마을점방이 있다.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게 틀림이 없다. 남편의 일 때문에 한국에 출장을 가 있던 어느 해 여름 친구의 소개를 받아 집 구하기 부탁을 해뒀던 영국 부동산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동네에 집이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여태 까다롭게만 굴던 남편이 뷰잉 viewing을 바로 예약했다. 처음 보는 남편의 발 빠른 대처에 나보다도 본인이 더 놀란 듯했다. 거기에 운과 운이 더해져 우린 드디어 웨스트우드 마을사람 Westwood Villager가 되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세 번째 이유에 공감을 하지 못할 수 있다. 한국은 두메산골이 아닌 이상 하나의 동네 안에 집도 있고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고 밥집과 술집도 있고 시장과 가게도 있다. 인간의 모든 필요가 원스탑으로 채워지는 어메이징 코리아! 영국도 런던같이 큰 도시라면 어느 정도 한국 흉내를 낼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사는 곳이 바스 Bath 시내도 아니고 차로 20분이나 걸리는 작은 빌리지 village, 웨스트우드 Westwood인 거다.
사실 도시 city가 아니고서는 영국사람들의 주거지는 상업지역과 분리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내가 영국 전역을 다녀본 탐험가가 아니라서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경험해 본 영국의 집들은 집들만 있는 곳에 있다. 예전에야 술을 마시고도 운전을 했으니 동네의 시작이나 끝에 펍이 하나둘씩은 꼭 있었다.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도대체 이런 곳에 누가 어떻게 알고 와?' 하는 펍들이 마치 한국 편의점처럼 흩어져있다. 시대가 바뀌어 음주운전은 불법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아쉽게도 이런 컨트리 펍들 중에 많은 수가 문을 닫았다. 그러니 이 작은 마을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식당 겸 술집인 펍이 세 개나 된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술집에 가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술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문화에 익숙한 나는 일행이 있어도 서서 술을 주문하고 마시는 도중에 결국 이 밤의 끝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로 붙잡게 되는 영국의 펍문화와 아직도 밀당 중이다. 그래도 영국에 온 지 8년이 되고 보니 왜 영국사람들에게 펍이 열렬한 사랑을 받는지 조금은 알 것 같고 특히 시골 동네펍과는 한국인인 나도 결국 사랑에 빠져버렸다.
금요일이면 자연스레 동네 펍 세 곳 중 어디로 피시 앤 칩스 fish and chips를 먹으러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요즘 어디 펍이 선데이로스트 Sunday roast를 제일 맛있게 하는지에 대해 이웃들과 정보를 나눈다. 개산책을 하다가 날씨가 좋으면 좋으니 펍의 야외 정원에 앉아 한 잔, 비가 오면 비를 피해 펍의 처마 밑에서 한 잔, 눈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큰 벽난로가 이글거리는 펍의 실내 흔들의자에 앉아 한 잔을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엔 동네 펍 세 곳 중에서 가장 옛날 느낌이 나는 펍인 뉴인웨스트우드 New Inn Westwood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전통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술을 따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