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A pint of Amstel, please.
테이블 번호와 위치 설명을 듣고 손님이 오면 간단히 해야 할 일들을 전달받았다. 예약사항이 적힌 노트를 보고 미리 정해둔 테이블로 손님들을 안내를 한다. 사람수에 맞게 메뉴판을 가져다준 후 음료주문을 받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뭐 별거 없네.' 싶은데 현실은 매몰차다. 손님들이 한 명씩 자신이 마실 음료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정신은 홀로 시베리아 광야를 걷고 있다. 이들이 외계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테이블 번호와 위치를 외우는 산을 오르자마자 넘어야 할 또 다른 봉우리, 음료의 종류와 위치, 그것들을 서브 serve 하는 방법 익히기를 만났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모르는 것들이 산처럼 내 앞에 쌓이고 있다. 내가 영국 펍에서 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현재의 난 조금 나은 처지일까. 아니겠지.
호기심이 없는 성격을 타고났다. 내 일이 아니면 크게 궁금하지 않다. 그러니 물어보는 일도 드물다. 그런 성격 덕분에 안온하게 살지만 적극적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얻게 되는 일이 적다. 사람, 장소, 물건 등등 싫지 않으면 바꾸는 일이 드물다 보니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는 일도 적다. 그러니 아는 술의 종류와 마셔본 음료의 종류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모르는 음료를 손에 받아 쥔다고 해도 뭐냐고 물어보는 일은 드물다.
영국에 온 지 8년이 되었고 영국에서만 지낸 지도 4년이 넘어간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펍이 세 개에 있는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가 참으로 부끄럽지만, 난 아직도 에일과 라거의 차이를 모른다. 이런 내가 펍에서 바 메이드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니, 하늘이 무너지고 있고 솟아날 구멍은 요연할 수밖에.
그래도 성실한 직원이 돼야 한다. 뼈를 갈아 넣어 내가 속한 조직의 융성에 이바지하는 한국 직장인의 태도(지금은 많이 변했다고 들었지만)는 나라를 바꿔 살아도 변하지 않는다. 무서운 한민족의 뒷바라지 근성. 이런 생각들을 하며 오늘의 스페셜이 적힌 메뉴판을 읽는데,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중년남성들이 들어왔다. 앗, 캐롤라인 Caroline이 보이지 않는다.
'Hello, What can I get you?'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일이 있을 때마다 구실로 삼아 동네 펍에 들려 식사를 하던 과거의 내가 이렇게 은혜를 갚는구나 싶었다. 묻긴 물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이름표가 붙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듯이 자연스럽게 바 스툴 bar stool에 착석하며 'A pint of Amstel and Peroni, please.'라고 말하고 고개를 들다 서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도 당황하고 나는 더 당황했다.
'Who are you? Where is Caroline?' 넌 누구? 캐롤라인은?
'She is somewhere. btw what is Amstel?' 어딘가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암스텔이 뭐니?
나 정말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