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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법대로 한다 Mar 07. 2020

꽃길을 건네다

‘언니 꽃길만 걸어’     


생애 처음이다. 여자한테 꽃 받긴. 근데 이게 묘하게 설렌다. 꽃 한 송이에 가득 담긴 따뜻한 마음에 대화하면서 입이 실룩실룩 감정이 날뛴다. 남자한테 꽃 받아도 그냥 그럴 나이인데 절친한 동생의 꽃에 시궁창 같던 마음에 봄내음이 분다. 취업했다고 꽃길만 걸으라며 프리지어를 건넨 그녀. 담담한 위로에 마음이 시큰하다. 누구보다 내 힘든 겨울, 가장 힘이 됐던 그녀이기에. 꽃 한 송이에 담긴 진심이 전해진다.


28살, 33살 다섯 살 차이. 그녀와 난 참 이상하게 만났다. 나이 서른셋에 집에 있으면 정말 콱 죽어버릴 거 같아서, 살고자 수영장 알바를 시작했다. 그렇다, 그녀와 난 수영장에서 만났다. 난 아르바이트생, 그녀는 인포 실장으로. 


그녀는 일도 잘하고 엄청 싹싹했다. 잘 웃고. 근데 보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분명 빡칠 상황인데 애가 웃는다. 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맨 처음엔 사회생활 만렙인가 했다. 근데 자세히 보니 눈엔 분노가 가득한데, 입만 웃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죽도록 욕하고 싶었는데 입에 나쁜 말 담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쁜 애 되는 거 같아 꾹 참았다는 그녀. 참 너답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성대모사를 잘한다. 상대방 특징을 귀신같이 잡아내 제스처까지 완벽 복사해낸다. 엄청 웃긴 캐릭터는 아닌데. 성대모사만 이상하게 잘한다. 아마 그녀의 주특기 배려가 빚어낸 결과인듯하다. 그녀의 성대모사의 베이스는 배려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카피한다는 건 평소에 타인을 애정을 갖고 지켜봤다는 뜻. 사랑이 넘치는 그녀다. 


사회생활하면서 숱한 후배들을 만났지만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동생은 없었다. 프로그램할 땐 친해도 내가 지명도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가면 연락이 뜸해졌다.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이득 보기 위한 인맥 관계였구나를 깨달은 후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뒀다. 또 상처 받기 싫어서. 근데 그녀는 내게 바라는 거 없이 잘해줬다. 하긴 한낱 알바생한테 뭘 덕 볼 걸 기대하겠는가. 정말 계산 없이 그녀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녀와 일한 지 3개월쯤 됐을 때였나,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이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주절주절 내 사연을 떠들어댔다. 참 물색없게. 내 사연을 듣고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해줄 위로가 없어 발을 동동거리다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서, 세상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그걸 계기로 조잘조잘 참 그녀에게 꾸준히도 떠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참 성숙한 위로를 건넸고, 그녀의 치유 3개월째. 난 드디어 기운을 조금 차린 듯하다. 여느 때처럼 그녀를 만나 오늘도 한참을 떠드는데, 그녀가 감췄둔 말을 건넨다.


‘언니가 기운 차려 다행이야, 전에는 언니가 말을 하면서도 뭐에 쫓기는 사람 같았어, 근데 지금은 편안해 보여’. 그 말에 심장이 쿵. 아,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구나란 생각에 미안해졌다. 사실 여태까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그녀에게 항상 위로만 받았던 거 같다. 내가 그녀의 에너지 뱀파이어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그녀는 진심을 다해 날 위로해 준 말인데, 그녀에게 받은 게 많은 나는 가슴이 울컥한다. 나도 뭔갈 꼭 주고 싶어서. 사실 저번 주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브런치에 쓰고 싶었다. 근데 내 1호 독자인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오글거려할까 봐 못 쓰다가, 그녀가 브런치로 유명세 타게 해 달란 말에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쓴다. 


다섯 살 차이. 여자들은 차이가 많이 나던 적던, 질투 때문에 참 친해지기가 힘든데, 그녀에게선 그런 향내가 풍기질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질투할 정도로 약지 못하다. 손해 볼 걸 알면서도 다 퍼주는, 다신 못 만날 퇴사자들 선물 혼자 다 챙기는 바보. 그녀가 바보라서 좋다.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더 성숙한 위로를 건네는, 애늙은이 같은 내 친구 지원이. 나도 니 인생에 꽃길 깔아줄게, 서로에게 꽃 같은 존재가 되어 오래오래 함께하길. 남자에게도 안 해 본 고백을 수줍게 그녀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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