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 창펀 미쳤다
뒷북 외길 인생의 고집이 꺾인 날
나는 굉장한 뒷북 전문가다. 편식하지 않고 분야를 고루 골라가며 뒷북을 치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글을 써본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것에는 일단 거부 반응이 있다. 주류에 물들면 내 색깔과 생각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심리가 알량한 크기만큼 남아있다. 내 자존심은 알량하다는 표현이 딱이다. 시시하고 보잘것없을 정도로 괜한 자존심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북쪽에 있다. 한겨울에는 완전 무장을 해야 한다. 롱 패딩이 유행하면서 디자인 선택지가 많아지자 사고 싶었다. 그런데 유행에 편승하기는 싫었다. 종아리가 나가떨어질 듯 칼바람이 불어도 롱 패딩을 사는 건 자존심이 허락 못했다. 주류에 편승하는 것이 싫다! 그렇게 버티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갔다. 그런데 진짜 강적은 2월이었다. 꽃샘추위가 왔다. 오들오들 떨다 울며 겨자 먹기로 롱 패딩을 샀다. 종아리까지 따뜻했다. 유행도 유행이지만 대중이 찾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나 싶었다. 그렇게 한 번 입고 봄이 왔다.
이번엔 여행 이야기를 해볼까. 홍콩 여행을 가고 싶었다. 계획을 세우려고 홍콩 여행 코스를 검색해보고 패닉에 빠졌다. 다 똑같은 장소, 비슷한 코스. 뻔하고 지겨웠다. 왜 그 멀리까지 가서 피크트램을 타고 미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에그타르트를 먹고 버터쿠키를 사는가? 나는 고리타분한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한국 사람들이 많이 안 가는 여행지를 살폈다. 계획도 안 짰다. 왜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계획을 짜는가? 보여주기 식 여행 계획과 인스타용 사진을 건지기 위한 여행 계획을 결코 따르지 않겠어. 그렇게 나는 계획도 안 짜고 무작정 홍콩으로 떠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콩 여행은 망했다.
여행 계획도 없이 길거리에서 몇 시간을 헤맸다. 발길이 닿아 간 몇몇 곳은 예쁘긴 했는데 '이거다!'싶은 것은 없었다. 음식은 또 어땠는지 모른다. 홍콩 맛집 검색하기가 싫었다. 내가 이 홍콩까지 와서 왜 한국 여행객이 추천하는 음식점을 가야 하지? 그런 마음에 검색도 안 했다. 결국 뭘 먹어야 할지 몰라서 편의점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3일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념품을 살까 했다. 하지만 기념품에도 유행이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기념품은 홍콩 버터쿠키. 나는 그 쿠키를 먹어본 적도 없다. 또 내 알량한 자존심이 튀어나왔다. 맛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한 오기가 생겨서 홍콩 버터쿠키를 절대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기념품으로 과자는 사고 싶은데 마땅히 살 게 없어서 편의점표 일본 과자를 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홍콩까지 가서 일본 과자를 사다니... 내 알량한 자존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홍콩까지 와서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맛있는 음식도, 멋진 여행지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남들 다 먹어본다는 홍콩 육포도 에그타르트도 심지어 딤섬도 못 먹고 편의점 음식과 길거리 어묵으로 때운 나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럴 거면 왜 왔지? 이대로 가면 난 억울하다.
빠르게 홍콩 공항 안에 있는 딤섬 맛집을 검색했다. 한국 사람들 다 가보는 딤섬집이었다. 그래. 자존심은 상하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주류에 편승해서 유행을 경험해보자라는 마음에 지갑에 있는 홍콩달러를 탈탈 털어서 창펀과 새우 딤섬을 넣은 국수를 시켰다. 여행 계획 짤 때 검색하다 지겹게 보던 뻔한 비주얼. 먹어본 적도 없지만 유행에 편승된 음식이니 그저 그럴 것이라는 나의 낙인이 찍힌 창펀. 창펀에 간장을 뿌리고 호로롭 빨아들였다.
출처 : flickr"아... 이 집 창펀 미쳤다."
홍콩의 거대한 용이 혀를 휘감아 오르며 육즙과 쌀면이 홍콩 야경 폭죽 터지듯 입 안에서 팡팡 흩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심하게 지나친 홍콩의 소호거리, 티켓조차 사보지 못한 홍콩 피크 트램, 그렇게 먹어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육포와 에그타르트. 그 모든 것이 아쉽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본청원'(正本淸源)
기본에 충실하라는 사자성어다. 유행이라고 우습게 여겼던 것에는 '대중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중성에는 어느 누가 경험해도 중간은 가는 '기본'이 있었다. 누가 가도 무난하게 맛있는 맛집들, 무난하게 만족하는 여행지. 수많은 한국인이 먹어 보고 가 본 유명 여행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행에 편승해서 중간은 가는 기본을 경험해봐야 사람들이 잘 안 가는 특별한 여행지나 로컬 맛집 같은 응용도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엉뚱한 여행지에서 헤매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기본에서 응용으로 가야 하는데 응용부터 하니 로컬 음식이, 골목이 얼마나 색다른지 예쁜지 알지를 못했다. 투덜거리면서 지나치기 바빴다.
나는 남은 창펀을 입에 빠르게 털어 넣고 쿠키 판매점으로 향했다. 관광객이 바글바글했다. 개미떼처럼 몰려있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주류를 거부하는 두드러기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나도 이제 주류에 편승하는구나... 씁쓸한 눈물이 슬쩍 났다.
정신을 차리고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을 따라 팬더가 그려진 쿠키 통을 집어서 여러 개 샀다. 열 받지만 그 쿠키가 홍콩에서 사 온 기념품 중 제일 인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