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읽는
〈파친코〉
광복절 – 혼자 건널 수 없는 강,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오늘은 광복절이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개인의 해방’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TV를 켰다. 오늘은 조국을 되찾은 날이지만, 화면 속에서는 자본주의가 물든 쇼핑과 방송매체의 소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규 채널 중 한 곳이라도 광복절에 관한 다큐나 특집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형식적인 행사로서의 광복절이 아닌, 우리 조국의 광복의 의미와 개인의 삶 속에서의 광복을 이야기하는 방송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나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TV 전원을 끄고, 오늘을 문학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소음을 끊어낸 그 고요 속에서,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선자의 삶이 깊이 스며 있는 〈파친코〉였다.
최근 내 마음속에서 선자의 삶이 메아리치는 〈파친코〉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오늘만큼은 조금 경건하게, 아니면 최소한 조용하게 시작하고 싶다. 요즘 특히 홈쇼핑의 쇼호스트들이 급하게 소비를 부추기는 목소리의 하이톤이 거슬린다. 건강 정보를 포장한 한쪽에서는 의료인들을 패널로 세우고, 채널을 돌리면 각종 건강식품을 짜고 파는 모습이 반복된다.
대중매체가 점령한 현시대의 비극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무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오늘은 역사의 아픔을 내 개인의 아픔과 연결 지어 정리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
〈파친코〉, 왜 하필 그 이름일까
파친코의 상징과 은유
<파친코〉라는 제목은 단순히 일본의 오락 기계를 뜻하지 않는다.
파친코 게임에서 공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누구도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삶도 그랬다. 역사의 거대한 힘 앞에서 개인은 방향을 통제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가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서 굴러갔다.
광복절은 국가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지만, 〈파친코〉 속 인물들의 삶을 떠올리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에 남겨진 조선인들은 법적으로는 해방된 국민이었지만, 사회의 차별과 배제 속에서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작품 속 파친코 업계는 그 싸움의 한 단면이다. 조선인들이 비교적 진입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경제 영역이었지만, 동시에 ‘저급하고 불법적인 산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파친코라는 공간은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현실이자, 차별을 상징하는 무대였다.
광복절에 〈파친코〉를 다시 읽는 것은, 해방이라는 단어가 결코 하루 만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이다. 역사의 강은 건넜지만, 강 너머에서 여전히 흩어지고 잊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친코라는 이름은 그 강을 건너며 겪은 우연과 부조리,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파친코〉는 한 가족의 4대에 걸친 서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간 조선인들의 이주와 정착, 그리고 그 속에서 맞닥뜨린 차별과 생존을 그린다. 선자의 삶은 단지 개인의 생애사가 아니라, 강제로 건너야 했던 ‘역사의 강’을 증언하는 기록이자, 디아스포라의 초상이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가난과 식민지 현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조건이 그녀의 선택지를 좁혔다. 그러나 선자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결단했다. 그녀의 선택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묵묵함 속에 시대를 견디는 힘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역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무게로 내려앉는지 절감한다. 선자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살아내고 서로를 지탱하는지를 보여준다. 광복절을 맞아 〈파친코〉를 다시 읽는 것은, 단지 과거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역사의 강은 여전히 흐르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 강을 건너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강을 건넜다고 안도할 수 없으며, 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흩어져 잊히지 않도록 기억해야 한다. 〈파친코〉 속 선자가 그러했듯, 누군가는 여전히 삶을 지키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되찾은 것은 영토와 국호였지만, 그 속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상처와 생존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파친코〉를 읽고, 그리고 드라마로 다시 보면서 나는 이 날의 의미를 새롭게 느꼈다. 그건 단순한 ‘이민 서사’가 아니라, 고향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의 역사, 즉 디아스포라의 기록이었다.
디아스포라의 다섯 얼굴
<파친코> 속 디아스포라는 다섯 가지 특징으로 드러난다.
식민지 현실, 가난, 사회적 억압이 사람들을 고향에서 밀어냈다. 그 떠남은 희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강제였다.
1. 떠남의 비자발성
떠남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강제였다.
언어와 이름, 생활 습관이 변해도 마음속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2. 정체성의 이중성
일본에서 살아가지만 ‘조선인’이라는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와 이름, 생활습관이 변해도 마음속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3. 차별 속의 생존 전략
제도·사회적 장벽 속에서 택한 직업과 관계.
생존과 존엄 사이의 줄타기.
4. 공동체의 끈
음식, 명절, 언어로 이어지는 작은 공동체.
타국에서도 서로를 지키려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
소설과 드라마, 다른 강을 건너다
처음 소설 〈파친코〉를 읽읽었을 때, 나는 ‘잘 쓰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서사의 밀도와 인물들의 사연은 훌륭했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래 남는 문장이 없었다.
감정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도 곧 사라지는, 그런 독서 경험이었다. 그런데 애플 TV 드라마로 다시 만난 〈파친코〉는 달랐다.
배우들의 눈빛, 숨소리, 화면의 색감과 질감이,
에서 스쳐간 순간들을 내 마음속에 오래 머물게 했다.
드라마는 ‘역사’보다 ‘사람’에 집중했다. 외로움에 지친 인물이 잠시 다른 이의 어깨에 기대는 장면에서, 그 사람의 지난 시간과 고단함이 한 번에 전해줬다.
책 속에서는 그냥 지나쳤던 순간이, 드라마에서는 숨이 막히도록 선명했다.
선자의 생존 의지
김치를 손질하는 선자의 손은
거칠고 빠르다. 그 옆에는 숨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얼굴이 있다.
그 호흡은 노동의 무게이자 , 생존을 향한 결연한 선언이었다. 선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차별과 가난 속에서 살아갔다. 김치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유일한 기술이자 가족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산이었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고,
손님을 부르는
모든 행위는 "나는 여기서 버틸 것이다."
라는 생존의 선언이었다.
여성의 삶은 종종 가족과 타인을 위한 돌봄과 노동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선자의 김치 장사는 단순한 돌봄을 넘어, 주체적으로 존엄과 생존권을 지켜낸 선택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숨소리 하나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그 숨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나는 그 숨소리에서 여성들이 삶의 고비마다 내뱉는 결의와 그 결의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게를 느꼈다.
그날 이후, 김치 냄새는 나에게 단순한 음식의 향기가 아니라 생존의 냄새다.
마치며
광복절의 의미는,
단지 나라의 해방만이 아니다.
억압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낸 개인들의 역사다.
『파친코』 속 인물들은
고향을 잃었지만
자신을 지키는 시선만은 놓지 않았다.
오늘 나는,
그 시선을 나에게로 돌린다.
어쩌면 선자의 삶을 빌려,
현시대를 절박하게 살아내는 나를
대신하여 공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흩어진 기억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나를 사랑하는 시선으로.
이민진 작가가 전하는 '소설 파친코'
https://youtu.be/zRqeMj-MGUE?si=QOD81AmjLkEqCu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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