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Project Hail Mary
SPOILER ALERT /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적 답변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 우리가 스스로를 잊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아는 사람을 찾아내 이렇게 묻는 것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요?" 나의 이름, 직업, 성격은 물론이고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단번에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안타깝게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그레이스는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 한 가지 물음에 사로잡힌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건 창 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우주. 영화 <마션>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작가 앤디 위어는 세 권의 훌륭한 하드 SF 소설을 써냈다. 마션, 아르테미스 그리고 프로젝트 헤일메리. 이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주선에서 홀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내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한다. 그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의 막막함을 함께 공유하도록, 관객은 그가 기억을 찾아가는 시간대와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동시간적인 플래시백을 활용해 그가 누구인지, 어째서 11.9 광년 떨어진 별 근처에 홀로 남게 되었는지를 인물 자신과 관객이 동시에 알도록 한다. 그는 자신이 우주선 내의 다양한 과학장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과학자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떠오른 하나의 기억. 그는 우주선에 타기 전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학 교사였다.
첫 번째 플래시백. 활기찬 분위기의 교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희미하게 존재감을 비친다. 그레이스가 학생들에게 모형을 사용해 현 우주에 발생한 문제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효과적으로 이 이야기의 시발점을 파악할 수 있다. 태양에서 금성으로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선(Petrova line)이 관측되었고, 이를 이루는 역시나 알 수 없는 물질, 아스트로파지가 태양의 온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 선 주위의 별들 또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단 하나, '타우세티'라는 이름의 별을 제외하고 말이다. '태양과 함께 희미해져 가는 인류의 미래는 타우세티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 생각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헤일메리 패스. 경기 종료 직전 성모송(Ave Maria)을 부르며 간절한 심정으로 장거리에서 던진 낮은 성공률의 패스에서 이름을 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11.9광년 떨어진 타우세티에 인간을 보내는 프로젝트이다. 그러니까, 헤일메리 패스처럼 낮은 성공률로, 아주 먼 거리를. 이 이름에 맞게 영화 속에서도 헤일메리 패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갑자기 낯선 우주선과 조우하며 상대 우주선에서 통을 그레이스 우주선 쪽으로 던지는 장면. 또 그것을 낚아채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마치 경기 장면 중 하나를 보는 듯하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 에바 스트라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현상의 해결을 위해서 기발한 과학자가 필요하다 판단한다. 그게 바로 '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단적인 논문을 냈던 라일랜드 그레이스였던 것. 그렇게 그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합류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같은 작품의 장르를 하드 SF라 부른다고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아주 치밀한 설정을 지닌 공상과학.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에겐 'OOOO 해석'이란 검색어가 작품 감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관문이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친절하고, 다정하다.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이 어째서 문제인 것인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따라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아주 자연스럽고 단순화된 방식으로 설명한다.
일례로, 사라져 가는 별들 속 홀로 살아남은 타우세티의 비밀을 밝혀내고, 이것이 인류를 살릴 방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가 과학자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시각적으로든, 인물의 대화에서든.
이 작품이 다정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티저에서도 등장한 외계 생명체 '로키'와의 만남부터 이 영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주로 이런 하드 SF 장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프렌드십으로부터 전해지는 따뜻함과 유머러스함은 이 영화의 매력을 한층 높여준다.
처음 본 로키의 외형은 거미와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다리는 다섯 개이고, 얼굴은 없으며, 돌과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말이다. 재밌는 지점은 그레이스와 로키가 서로를 점점 알아 가면서, 그가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철없는 아이 같아 보이기도, 지적인 공학자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딘가 어긋난 익숙한 외형이 오히려 다양한 상상력을 유발하고, 관객 나름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
로키와 그레이스가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이다. 주로 영화에서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룰 때, 한쪽이 외계 행성으로 찾아가거나, 외계생명체가 지구로 오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의 행성을 떠나 우주 한복판에서 방황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두 동료를 잃었고, 로키가 함께 온 스무 명(?) 언저리의 친구들을 잃은 것도 유사하다. 그들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서로를 만났다. 이것을 또다시 경기로 비유한다면, 한쪽이 홈이고 다른 쪽이 어웨이인 경기가 아니라 둘 다 어웨이로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만나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편, 다름이 서로에게 구원이 되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인간으로서 빛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우주비행을 위해 필수적인 상대성 이론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다. 그러나 로키는 빛이 아닌 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존재로서 그런 지식을 습득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키는 이 법칙을 무시할 만큼의 충분한 연료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레이스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레이스는 과학자, 로키는 공학자로 그들의 전문적 지식에도 갭이 존재한다. 그레이스의 과학적 지식으로 로키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구하게 되는 장면 또한 서로 다른 지식의 폭이 서로에게 구원과 희망이 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별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이동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니다. 이들의 우정이고, 종 전체의 삶보다는 개인의 삶이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개인의 선택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영웅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버디 영화를 보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또 상대를 위한 희생 같은 것들이 주가 되는 색다른 형태의 SF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 속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설정들이 있다.
첫째로 주인공이 헤일메리 호에 탑승하게 된 과정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가서 밝혀지지만, 그레이스는 이 우주선에 타는 것에 자원하지 않았다. 상황상 그가 유일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과학자라 판단되었고 참여 거부를 하였음에도 강제로 이 우주선에 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젝트는 왕복이 아닌 편도로 기획되어, 말 그대로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흔쾌히 수락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란 말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다지 사명감이 있지도 않고, 겁쟁이이며 타인의 압박에 의해 기절한 채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물이다. 우리가 흔히 보던 우주 영웅의 특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둘째로 헤일메리 호 내의 정신건강 관리 시스템이다. 지구의 다양한 장면을 영상으로 함께 보낸 점이 흥미롭다. 바다나 산, 영화 장면처럼 무섭고 외로울 우주여행에서 일종의 테라피 효과를 내도록 하는 장면들을 재생할 수 있다는 점이 색다른 지점이다. 이후에 로키가 그레이스의 우주선에 왔을 때도, 그의 이름과 똑같은 영화 <록키>의 한 장면을 보여주거나, 지구의 자연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을 보여주며 우주에 고립된 존재끼리 외로움을 달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로 두 주인공이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다. 로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단어를 녹음해 라벨링 하고 번역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직관적이고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 목소리를 입혀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도 유머러스함을 더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이 목소리로 짧게 출연해 소소한 재미를 준다.
약간은 로봇 같기도 한 귀여운 로키의 말투는 영화를 다 감상한 후에도 오래도록 남는다. 이 아티클의 제목 또한 로키의 말투에서 따왔다. 의문문의 가장 마지막엔 언제나 '질문?'이라는 말을 붙이는 점도 매력적이다. 엄지를 위로 치켜올리는, 우리에겐 '좋다'라는 상징인 제스처는 로키의 신체 구조상 어려워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그와 완전히 반대된 엄지를 아래로 향하게 하는 제스처가 이 둘 사이의 비밀 신호처럼 좋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도 가슴을 괜히 몽글몽글하게 하는 지점이다.
넷째로 영화의 음악이다. 이 영화가 감각적이라 느낀 가장 큰 포인트는 음악이었다. 특정 장면에서는 대사와 음악이 완전히 일치해, 대사가 마치 노래의 한 소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들어오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엔딩크레딧의 이미지와 음악 또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인 스트라트가 아주 단호하고 인간성 없어 보이는 여성 인물인 점도 기존의 영화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특히 그녀보다는 로키에게서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다'라고 말하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스트라트가 커피 두 개를 건네받고 약이 목에 걸려 힘들어하는 그레이스가 하나를 달라고 말할 때, "두 개 다 제 겁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녀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레이스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걸어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기는 그녀와, 각자의 고향 별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있는 로키와 그레이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전체가 아닌 개인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가 인간성이라 여겨왔던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도 스트라트의 선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그렇기에 스트라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해리 스타일스의 Sound of the Times. 스트라트 배역을 맡은 산드라 휠러가 선정한 곡이라고 하는데 가사가 정확히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을 주고 있어 놀랍다.
Just stop your crying, have the time of your life
이제 그만 울고, 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즐겨
Breaking through the atmosphere
대기권을 뚫고 나아가는 동안
And things are pretty good from here
모든 것은 다 괜찮아 보여
Remember everything will be alright
기억해, 다 괜찮아질 거라는 것을
We can meet again somewhere
우리는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거야
Somewhere far away from here
여기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원작 소설에는 영화에 담기지 않은 아주 디테일한 요소들이 담겨있다. 영화와 소설 모두를 즐기길 추천한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 아닐까. 그레이스와 로키의 따뜻한 원맨원롹쇼.
프로젝트 헤일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