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이 Dec 25. 2022

축복

부디

오늘따라 옆 건물 작은 교회의

기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바람만 겨우 드나들 만큼 좁게 벌어진 창틈은

숨구멍인지 망가진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흔한 붉은 십자가 하나 옥상에 달지 못해

창문에 붙인 교회, 두 글자가 전부인 곳에서

누가 왜 저리도 간절히 소리치는 걸까요

어릴 적 물에 잠겼다 나오며 새로 태어났던 저는

이젠 왜 그 흔한 구절 하나 외지 못하고

저 좁은 창틈 사이로 들리는 소리들이

낯설기만 할까요

그때의 저는 또 언제 죽었기에

지금 저는 몇 번째인가요, 혹시 아실까요


종일 자신의 잘못을 헤아려봤다는 당신에게

저는 아무 기도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괜찮다는 말이라도 했다면

당신은 여기 남았을까요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떨리던 두 손을 떠올립니다

부디

용서받을 수 있는 밤이길

당신 목에 그 두껍고 질긴 참회록이

물에 젖은 낱장 휴지처럼 쉬이 찢기길

손바닥에 붉은 십자가를 그리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기도를

아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따라 합니다

부디 용서받을 수 있는 밤이길


2022.11.09.25:07.

작가의 이전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