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생일 정도는 알고 싶었다.
아닐 수도 있어요. 전화를 몇 번이고 해봤는데 어떻게 매번 통화가 안 돼서요. 찾아갔을 때도 안 계셨고. 복지회 분은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 아니 이 정도면 확실하긴 한 건데 가장 중요한 본인 확인을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애초에 알려줘선 안 되는 정보였다. 본인 확인은 사실 여부와 더불어 만날 의사가 있는지 묻는 과정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은 내가 찾아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정상적인 상봉과정에선 있어선 안 되는 상황이다. 정상적인. 내가 조금 곧 죽을 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죽기 전에 생일 정도는 알고 싶었다. 어쩌면 몇 번은 불렸을 이름도. 태명이라도. 왜 버렸는지,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어릴 땐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래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긴 했는지, 이름과 생일만이라면 직접 만날 필요가 없을 텐데도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없기에 차마 돌아간다고는 할 수 없는 곳, 고향에.
태어난 곳에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간다니 연어가 따로 없군.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더했다.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느꼈던 불편함은 공항에 내리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본능적인 끌림이나 익숙함 같은 건 없었다. 두 나라의 거리만큼이나 모든 것이 멀고 어색했다. 나와는 체형도, 피부와 머리, 눈 색도 달랐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오다 이제야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왔는데, 거울 속에서나 볼 수 있던 모습을 주변 어딜 봐도 볼 수 있는데, 정작 느껴지는 건 이질감뿐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지체할 수 없었다. 다행이랄지, 복지회 담당 직원은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할까 싶을 만큼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감정이 앞서는 사람. 평소 같으면 가장 꺼림칙한 상대였겠지만 지금은 이만큼 좋은 사람도 없었다. 사정을 듣고는 망설임 끝에-아마 마음은 이미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이러면 안 된다는 어떤 직업윤리 같은 것이 걸리는 듯했다-주소를 알려 주었다. 나를 낳은, 그리고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버린 여자가 사는 집, 지금 내가 선 이 문 앞에 아파트 호수를.
‘여자’가 복지회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날 만나겠다고 했을까. 아니라고 했다면, 어떤 이유에선가 거절했거나 그럴 생각이라면, 지금의 난 얼마나 불편한 방문자일까. 정신없이 여기까지 왔지만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일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설임도 잠시.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이 유일한 동력이 되어 여기까지 왔는데, 더 나빠질 게 뭐가 있다고.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여자’가 거절했다면 그 직원은 당신 아이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어 한다고, 한 번만 만나보시면 안 되냐고 울며 매달렸겠지. 난 또 그렇게 불쌍한 아이가 되었을 거고.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만큼 끔찍한 상황은 아닐 거란 생각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게 위안이 되었다. 불필요한 생각을 숨에 실어 크게 내뱉는다. 초인종을 누르고 몇 번 입 안에서 굴렸던 말을 한다.
실례합니다.
2018.03.13.2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