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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May 09. 2024

한 줄 일기

갑자기 일기가 쓰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주로 출근길 혹은 퇴근길 운전을 하다 지나가는 풍경들 속에서 한 끗 다른 모습들을 봤을 때인데, 그 반짝이는 순간들엔 일기를 써 볼까 하다가도 그 일 말고는 쓸 게 없을 거 같아 늘 그냥 그만두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옆 차선에서 앞서 나가는 봉고차 뒷 범퍼 위로 아기 손바닥 크기의 핸드 프린트를  보았을 때 같은. 저 손바닥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 글귀도 없이 정말 손바닥에 페인트를 바르고 찍은 듯한 모양새에 저 차 주인의 아이가 ’ 아빠, 힘내세요 ‘ 하며 꽝 손바닥을 찍는 있을 법하지 않을 일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혹은, 막히는 도로 한가운데서 먹을 것을 파는 아주머니 뒤로 업혀 있는 아이가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았을 때. 모자 위로 달랑이는 꿀 벌  장식들을 보며 미소 짓게 될 때.


시꺼먼 가죽 재킷에 까만 신발을 신고 까만 헬멧을 쓰고 까만 바이크를 탄 채 웅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이커의 등 뒤로 노란 데이지 패턴이 박힌 까만 잔 스포츠 백 팩. 아저씨의 컨셉은 무엇인 걸까.


동생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길을 건너는 형을 보았을 때. 말 안 듣고 성가신 동생이지만 사고로 다칠까 봐 걱정은 되는, 귀찮음과 얄미움을 책임감과 사랑으로 결국 이겨내는, 그러나 너끈히 이길 만큼은 아닌지라 엄마가 봤으면 목 늘어진다고 혼날 법한 모양새로 잡아끌고 있는 형의 모습 위로 큰 아이의 모습이 겹쳐질 때.


신호를 기다리며 빨간 불 앞에 멀쩡히 서 있다가는 갑자기 앞 차를 박고 먼저 앞으로 질주하던 차, 어디서 나타난 건지 곧이어 그 뒤를 쫓아가던 언더커버 경찰차를 보았을 때. 이 상황은 무엇. 영화에서나 보던 것 아니야?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찌그러진 차를 살피던 앞 차 주인이 안됬으면서도 간사하게도 들던 내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마음.  도망가는 차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써 놓고 보니 쓸 게 없어서 못 썼다기보다는 소재로선 충분한 일들이지만 그 이후 이야기들로 발전시킬만한 쓰기 근육이 없어서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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