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다. 다음 끼니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도, 만드느라 부산스러울 필요도 없는 호사를 누린 지 17일 째다. 평소 ‘엄마’라는 이름에 지어진 삶의 무게에 대해 , 가사 노동 분담의 필요성에 대해 소리를 높이다가는 막상 엄마 집에 왔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응성받이가 된 것처럼 모든 걸 엄마에게 맡기고 있는 나 스스로가 간사하면서도, 엄마가 “됐으니 있는 동안 그냥 쉬어”라고 하는 말을 못 이기는 척 듣고 있다. 꼭 노동을 나누지 않더라도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더하면 좋을 텐데 낯 간지러워 그조차 못 하는 나도 참 한심하다. 그러는 중 커피를 내리고, 키위를 깎고, 삶은 달걀 껍데기를 까는 등 눈에 보이게 식사 준비를 도우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하는 엄마의 등을 향해 선풍기 방향을 돌려주고, 어두워지는 거 같으면 부엌 불을 켜주는 등 안 보이게 엄마를 챙겨주는 아빠의 모습은 더 좋다.
하루는 천천히 시작되다가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거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잠들고 엄마가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며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에 깨어난다. 덕분에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없으나, 덕분에 늘어지지 않고 일찍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좋다. 많은 것을 한 거 같으면서,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한 일들을 적어볼까.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영화관에 가 영화를 보고, 광화문 광장과 종로 교보문고에도 다녀왔다. ”어머, 얘들아. 여기가 광화문인가 봐 “ 호들갑을 떨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간 곳은 사실 서울 도서관이었어서 나의 무지함에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렇게 의도치 않게 발견한 곳이 서울 도서관이었어서 좋았다. 지내는 내내 ‘많이 컸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큰 아이는 더운 날씨에 걷기도 잘하고, 새로운 음식도 잘 시도해 보는 중인데 그날도 역 안에서 파는 호두과자를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사줬었지. 우습게도 나는 한국에 와서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과 깨끗한 지하철을 타보고, 파는 먹거리들을 사주는 그런 소소한 일들을.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풍경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언니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출퇴근 시간은 피했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인스타그램에 많이 올라온다며 가보라던 인천의 인스파이어 아레나는 생각보다 부모님이 좋아하셨어서 얼결에 효도한 기분이 들었고, 파라다이스의 원더박스도 아이들에게 딱 맞는 수준의 놀이기구들이었어서 롯데월드를 따로 안 가도 되니 좋았다. 가장 기대했던 제주도 여행은 가장 기다리던 작은 아이가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생각보다 많이 놀지 못해 아쉬웠지만, 아이 때문에 속상해하는 나의 모습에 또 속상해하실 부모님, 속상해하실 부모님 걱정에 더욱더 속상하게 될 나를 떠올리며 사랑하기에 계속되는 이 이상하고도 멈추기 힘든 속상함의 연쇄작용을 끊어버리고 즐거웠던 부분을 더 많이 기억하기로 했다.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역시 마음에 몽글몽글하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은 어눌한 한국말 발음에 갑자기 너무 귀엽게 변하던 아이들과 “잘 자세요” 같은 어설픈 말들에 터져 나오던 웃음들, 식사 후 카페에 앉아 부모님과 같이 마시던 커피 (아이들이 그만큼 컸기에 가능해진), 라테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돌아오는 길엔 항상 바로 잠들던 엄마의 뒤통수, 찌는 듯한 더위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 잡고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나서던 아이들의 뒷모습 같은 것이라는 걸 벌써 알겠어서 여름이 다 끝나버린 것 같이 마음이 시큰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