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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Feb 19. 2024

호수의 고장 윈더미어와 그래스미어

(feat. 셀레스트와 워즈워스)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진다. 블랙번의 호텔은, 차에서 내려 마주했던 본관의 전면은 근사했지만, 단체 여행객 숙소는 본관 건물 뒤 허름한 2층 건물에 배정되었다. 게다가 짐은 다른 방으로 배달이 되어 한참을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방안에 티슈도 없어 화장실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써야 했고 방안에 냉장고도 없다. 제목만 4성급 호텔이다. 허술한 서비스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져, 출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방앞에 두면 버스 화물칸에 실어주겠다던 여행 가방들이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다 못해 인솔자들과 버스 기사 안젤라까지 총동원이 되어 가방 나르기 경주가 시작되었다. 맙소사. 일행들도 일손을 돕고 싶었지만 우리는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인솔자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다. 나중에 본사로 컴플레인이 들어갈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는 오늘도 출발한다.      


    



여행 중에 비가 내리면, 운전하는 사람은 고생이지만 뒷자리 옆자리에 앉아 실려 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촉촉해진다. 창밖을 내다보며 우중 명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들려주는 음악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살아가는 나는 음악 취향도 다양하다. 온갖 음악을 다 듣고 늘 새로운 음악 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클래식, 힙합, 알앤비, 재즈, 록, 팝, 케이팝, 월드뮤직, 영화음악을 모두 넘나들지만, 가장 청취 빈도가 낮은 것은 트로트 음악과 7080 가요다. 하지만 트로트와 7080 가요 중에서도 특정 시대의 몇몇 아티스트들의 것은 또 즐겨 듣는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이후 지난 10년간은 음악에서 큰 위안을 받으며 지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할 때, 지상에서 10센티쯤 멀어지고 싶을 때, 날씨가 좋을 때 혹은 나쁠 때, 트레킹 중에, 잠들기 전에, 눈을 뜬 아침에, 일하는 중에, 음악은 내 삶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예술 장르 중 천상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음악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다음 생에는 싱어송라이터로 태어나기를 희망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발견한 가수는 영국 가수 셀레스트였다. 특히 <Some goodbyes come with hellos>라는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20대의 나이에 어찌 그런 소울을 지닐 수 있는지, 멜로디도, 음색도 바이브도 모두 좋았지만, 와닿는 구절이 있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이 끌리는 것을 선택할 수 없어

그건 잃을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것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제목이기도 한 후렴구 <Some goodbyes come with hellos>도 그랬. <Strange>와 함께 여행 중 가장 많이 들은 노래들이다.     


오다 말다 하는 빗줄기에도 무심해질 즈음, 버스는 일행을 한 호숫가 선착장에 내려놓았다. 호수 변에 오리와 백조 무리가 사람들과 뒤섞여 노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 대형 유람선에 올라 막대기처럼 긴 호수를 가로질러 갈 예정이었다. 승선 시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어슬렁어슬렁’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어슬렁대는 것만큼이나 내게 훌륭한 시간은 없다. 그 시간에 많은 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자극일 때도, 내면의 술렁임일 때도 있고 그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화학작용일 때다. 오리 사이를 거닐다가, 길 건너 노천에 선 장에도 들러보고, 직업병이라고 할 만한 책방 들르기 등을 하고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배가 떠날 시간이다. 사실, 자연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윈더미어 호수보다, 호수를 건넌 다음에 가게 될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의 고장 그래스미어가 더 기대되었다. 사실 호수를 배 타고 건넌다는 것은, 주변 풍경이 빼어나지 않은 이상 밋밋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잉글랜드 북서부에 산과 호수로 가득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긴 하지만, 도보 여행의 성지이기도 해서 트래킹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호수 주변 마을들에 대해 잘 알고,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할 수 있다면 매력은 배가될 것인데, 아쉽게도 주마간산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이 거세어졌다 잦아들었다 하며 놀이하듯 내렸다. 유람선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작은 로터리 앞에서 멈춰 섰다. 길 건너 우측으로 꺾어진 골목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서는 ‘코티지’라 부르는 지붕 낮은 시골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하나가, 윌리엄 워즈워스가, 아내와 누이 도로시와 함께 약 10년간 머물렀던 ‘도브 코티지’라고 했다. 영국인들은 이곳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라고 자랑한다. 그들이 도브 코티지에서 지내게 된 것은, 시인 콜리지와 근방의 호수 지방을 여행하다가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들의 도브 코티지에서의 생활은 단순하고 소박했으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도로시 역시 글쓰기에 재능이 있어 그녀가 남긴 일기나 서한은 ‘일기작가’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냈다. 워즈워스는 이 시기에 죽음과 이별, 고독, 고뇌와 인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시는 단순한 '자연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관한 것이 많다.     


나는 골짜기와 언덕 너머 저 높이 흐르는

구름처럼 홀로 떠돌았네

그러다 문득 한 무리의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지

호수변 나무 밑에서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춤추는 것을     


아마도 인적 드문 호수변을 산책하다가 느닷없이 펼쳐진 황금빛 수선화의 물결과 마주친 모양이다. 고독했던 시인은 그 순간의 반가움과 흥겨움을 잊지 못하고 오래 간직하다가 문득문득 생각났을 것이다. 나 또한 제주 한라수목원에서 어느 이른 봄에 마주쳤던 한 무리의 수선화를 기억한다.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직 바람에 찬기가 가시지 않아서 여전히 겨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꽃과 맞닥뜨린 놀라움도 함께였다. 내가 만난 수선화는 황금빛이 아니라 정직하게 순도 높은, 뽀얗고 쨍쨍한 노란색이었다. 그래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시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만나 우리는 한마음이 된다. <황금빛 수선화>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나는 구름처럼 홀로 떠돌았네>의 첫 연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종종 ‘고독의 축복’인 마음의 눈에 비친 수선화를 떠올리면 기쁨으로 벅차올라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춘다고 노래했다. 그래스미어의 명물 생강빵가게 바로 옆으로 <워즈워스 수선화 정원>이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계절이 맞으면 수선화가 핀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그래스미어의 명물 생강빵 가게(좌) 윌리엄 워즈워스의 가족묘(우)


워즈워스 일가의 가족 무덤을 방문하고 나서는 거세진 빗줄기에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서 우산 살이 망가져 버릴 정도였다. 카페를 찾았으나 조그만 시골 마을에 몰려든 관광객들이 모두 비를 피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는 곳마다 만석이었다. 잠시 비를 맞으며 망연자실하다가 조금 전 눈에 띄었던 작은 책방이 생각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887년에 개점했다는 'Sam Read'라는 서점이었다. 오래된 돌 건물에 우리네 동네 서점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소박한 실내였다. 그 안에서도 내내 어슬렁대다가, 주인장 눈치가 보여서, 워즈워스의 시집을 한 권 샀다. 그 시집을 내 서울집의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될 땐 이 여행을 추억하겠지. 또, 한동안 국내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영문 번역판을 그 서점에서 발견하고 내 책인 양 매우 반가웠다. 이제 모든 창작활동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진출을 늘 염두에 두며 작업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궂은 날씨에도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 지역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그렇게 트래킹을 하며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일 것 같았다.


                                                                   

1887년에 문을 연 그래스미어의 작은 서점 <샘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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