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출발점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이야기는 지상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힐라룸은 엘람(현재의 이란에 있던 고대 왕국)에서 바빌론으로 온 광부이다. 그는 원래 땅을 파던 광부이지만, 이번에는 하늘의 천장을 파 들어가기 위해 바빌론에 왔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지상에서부터 수레를 끌고 바빌론의 탑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탑을 올라갈수록 그는 신 야훼가 정말로 이 탑의 존재를 인정했을지, 혹시 그게 아니라면 인간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몇 세기에 걸쳐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이 탑이 진정으로 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야훼가 그것을 싫어할 까닭이 없다고 믿는다.
넉 달에 걸쳐 하늘의 천장까지 닿아있는 탑을 올라가는 동안, 그는 탑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탑에 늘어뜨린 구조물에 있는 흙에서 채소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곳의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까마득하게 높은 탑의 길을 뛰어다니며 논다. 조금 더 올라가자 달과 태양의 고도보다도 높아진다. 태양이 아래에서 위로 비추기 때문에 채소가 거꾸로 자란다. 탑의 중간에는 별이 박혔던 자국도 남아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미루어볼 때, 힐라룸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물리 세계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읽으며 '작가가 세계의 천장에 대해 뭐라고 썼을까?' 궁금했는데, 이 세계에는 정말로 천장이 존재한다. 그것도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어딘가에 물로 가득 차 있는 천장이다.
탑의 꼭대기, 천장과 맞닿은 높이까지 도달하자 광부들은 마침내 화강암을 쪼개는 기술을 가진 이집트인들과 함께 천장을 파 들어가기 시작한다. 혹시라도 하늘의 저수지를 뚫어서 대홍수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대한 미닫이 문을 만들어, 터널이 저수지를 뚫었을 경우 문을 닫아 물이 떨어지는 것을 막도록 설계한다. 천장의 터널을 파 들어가는 작업은 몇 년이 걸렸으며, 그 사이 광부들도 탑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날 터널의 가장 끝에서 계속 파 들어가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놓고선 내려오려던 힐라룸은 마침내 저수지에 균열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물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아래쪽에서는 재빨리 미닫이 문을 닫아버리고 힐라룸은 터널에 갇히게 된다. 그는 차오르는 물과 함께 다시 위로 올라가다가 저수지의 균열을 찾아내게 되고, 그곳을 통해 저수지로 들어간다. 그랬다가 좁고 긴 터널을 지나 익사하기 직전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곳은 컴컴한 동굴이었고, 그는 길고 긴 굴을 지나서 마침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바깥은, 시나르 평원, 즉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땅 위의 장소였다. 그는 하늘의 천장의 저수지로 들어갔는데 처음 탑에 올라가기 전에 출발했던 땅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힐라룸은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는가를 생각하다가, 원통형 인장을 떠올리게 된다. 원통 위의 한 지점은 한 바퀴를 돌면 다시 만나게 되어 있듯이, 힐라룸이 살고 있는 세계 역시 하늘과 땅이 그런 식으로 맞닿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다시 탑으로 향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정말 저렇게 닫힌 계의 모양을 한 세계가 존재하는 게 가능할까?'였다. 그래서 쳇지피티에게 물어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와 똑같은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세계가 3차원 구의 닫혀있는 형태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론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테드 창이 이야기 속에서 만든 세계는 그와 같은 닫혀 있는 세계, 그래서 물리적으로 세계의 바깥이나 중심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일부러 극단적으로 만들어놓은 셈이었다.
테드 창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닫혀 있는 세계에서는 세계의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또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 사람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계는 존재하되 끝은 없고, 나아갈 수는 있되 어딘가로 향하는 방향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인식의 경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구라는 표면 위에서 우리는 2차원적인 세계를 경험하지만 결국 나아가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사실 중심이 존재할 수가 없다.
테드 창의 세계는 이것을 측면이 아닌, 높이 방향으로 설정해 놓은 세계인 셈이다. 만약에 그림을 그려본다면, 땅과 하늘의 천장이 맞닿아 있고, 바빌론의 탑이 마치 도넛처럼 둥글게 휘어져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탑의 어느 지점도 중심이 아닌 채로, 그저 둥글게 휘어진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드 창의 세계를 상상했을 때, 그리고 그 안에 나를 위치시켰을 때 나는 처음에 현기증이 들었다. 내 위치를 잃어버린 느낌. 방향을 잃은 느낌. 그것은 막막한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세계가 그렇지 않다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이미 지구 표면은 둥글게 이어져있는데 말이다.
그다음 밀려들어온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책 속에서 힐라룸은 말한다. 인간은 여행 끝에 결국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나의 여행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내가 인식의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고 믿었던, 내 인생의 여행이 만약에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면, 이 여행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인간은 끝없는 호기심을 갖고 세계에 대하여, 진실에 대하여 알고자 나아간다. 어떤 방향을 갖고, 바깥을 향해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넓혀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 그 인식의 끝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인식 자체가 닫혀 있는 세계밖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인간의 호기심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왜 탐구하는가. 왜 나아가는가. 왜 여행하는가. 책 속에서 힐라룸은 말한다. 인간은 그 여행을 통해 세계가 만들어진 신비, 예술을 짧게나마 일별하고 자기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엔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쯤 왔는지, 내 위치가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내게 한순간이나마 전체 세계의 구조를 인식할만한 그 “일별의 순간”이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것 같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더라도, 나는 아직 그 세계를 보지 못했으므로 계속 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자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힐라룸이 세계의 구조와 자신의 위치를 잠시나마 느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다시 탑으로 향했듯이 말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듣고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탑을 계속 오를 것이다. 나 역시 인생이라는 긴 여행동안 내 인식의 끝이 다시 내게로 닿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여행을 계속해나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