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의 바다에 몸을 담그는 순간
작가 테드 창의 이 소설은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 의 원작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속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고, 영화와 스토리가 약간 달라서 영화를 흥미롭게 보신 분들이라면 책 또한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 루이즈는 언어학자이다. 그녀는 정부를 통해 외계 존재 헵타포드들과의 대화에 동참하게 되면서,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조금씩 배우고 익히게 된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 문명이 인과론적 방식으로 물질세계를 해석해 왔다면, 헵타포드들의 문명은 목적론적 방식으로 물질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발달시켜 왔다. 여기서 인과론적 방식이란, 사건 간의 연결이 시간적 순서, 그리고 인과적 순서에 따른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목적론적 방식은 우리에게 다소 낯선 개념인데, 사건의 시작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고, 경로는 목적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으며, 사건의 주체는 그 과정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보는 방식에 가깝다.
책 속에서 이 개념의 도입은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Fermat's principle of least time)'라는 물리학 원리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서 빛이 물속을 투과할 때를 예로 든다면, 공기 중을 통과하던 빛이 물을 만나면 굴절된다고 보는 것은 인과론적 해석이다. 반면에 공기 중의 한 점에서 물속의 한 점에 이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가장 최소화하는 경로를 선택한 것이, 굴절된 경로라고 보는 것이 목적론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목적'은 시간의 최소화이다.
(책 속에서는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고 있는데, 물속으로 투과하는 빛의 다양한 경로를 가정해 보면 빛이 직선거리로 투과할 때보다 일정 각도로 굴절될 때가 가장 최단 시간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빛이 공기 중에서보다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책 속 언급에 의하면, 이는 물리 철학의 오래된 의문이라고 한다.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빛의 행동이 마치 목표 지향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물리 법칙은 통상적으로는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와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고 루이즈의 동료인 물리학자 게리가 말한다.
루이즈는 외계 존재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 '헵타포드B'를 익히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방법을 획득하게 된다. 이 언어는 음에 상응하는 방식의 문자가 아닌, 이미지 자체가 의미를 갖는 문자인 데다가 각 이미지의 연결되는 방식이 인간의 언어와 달리 일정한 방향성이 없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려면 애초에 문장의 끝 부분까지 고려해야만 문장의 첫 부분을 써나갈 수 있다. 첫 시작에 쓴 문자가 문장의 끝부분의 구성까지 연관되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완벽하게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현재 언어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이즈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보면서 '헵타포드B'를 연습해 나간다. 그리고 게리를 통해 얻은 그들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가령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를 통해 얻은 새로운 통찰('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통해 그들의 언어 방식도 이해해 나간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녀는 점차 새로운 기억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이 쏟아 들어져 오는 경험이다. 그녀는 그렇게 헵타포드를 만난 시점부터 이후 50년까지의 기억을 맞아들인다. 이것들은 연속적이라거나 순서대로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50년 정도의 세월을 형성한다.
그 기억들 속에는 그녀의 딸에 대한 기억이 있다. 게리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그리고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까지 포함된 기억들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현재 시점은 그녀가 아이를 아직 낳기 전, 아이를 잉태하기 직전의 시점이다. 즉, 그녀는 미래의 결과를 미리 아는 채로 그 시간을 사는 것이다.
헵타포드들은 갑자기 왔듯이 갑자기 떠난다. 왜 그들이 왔는지, 왜 떠났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루이즈도 알지 못한다. 단지 루이즈는 아쉬워한다. 햅타포드들의 세계관을 좀 더 많이 경험하고,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더 느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랬더라면 아마 나는 그들처럼 사건의 필연성의 바다에 완전히 몸을 담글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현재 시점은 여전히 아이를 갖던 그날 밤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이는 물리 철학을 삶에 가져와 아름답게 은유한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연성의 바다’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시간이라는 것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과적이라기보다는 목적론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생각해 봤다. 결과가 이미 있는 상태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는 것으로 삶을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에 때로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받아들였을 때 종종 그건 어떤 예감과 함께 오곤 했다. 마치 데자뷰를 본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그건 말 그대로 선택이라기보단 받아들임에 가까웠다. 그럴 때의 마음은 무언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테드 창의 은유에 따르면 그것은 ‘경로’에 따른다는 것에 가까운 느낌이다. '의지'라기보다는 '합의'에 가까운 상태.
테드 창이 끌어온 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시간의 수학”이 아니라, 블록 우주(block universe)라는 사고 실험에 가깝다.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이미 ‘존재’하고, 우리는 그중 한 단면을 통과하며 인식할 뿐이라는 관점. 이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원인에서 결과로 흘러가는 강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지도를 한 방향으로만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테드 창은 여기서 자유의지를 “없다/있다”로 단순하게 자르지 않는다. 그는 자유의지를 선택의 순간에 두지 않고, 의미의 태도 쪽으로 옮겨놓는다. 책 속에서는 그는 인과론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테드 창은 이야기 속에서 사랑, 출산, 상실 같은 것들을 “알았더라도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더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을까?”라고 루이즈를 통해 묻는다.
나 역시 루이즈처럼 출산, 육아를 겪어봤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또한 “선택”하지 않고 마치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자기의 삶 안으로. 그것이 ‘순리’ 혹은 ‘섭리’라고 부르는 세계의 작동 원리가 아닐까, 인간만이 거기서 벗어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시각에서 갈등하고 번뇌하고 있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출산, 육아라는 삶에 복무하고 있는 동안은 내 자신이 마치 동물이 된 것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인간임을 잠시 내려놓고 그냥 세계에 속한 동물이 된 느낌. 그건 생각을 멈춘 상태가 아니라, 선택 이전의 층위로 내려간 경험에 가까웠다.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살아진다. 살아지는 방향으로 몸과 세계가 맞물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맞물림에서 한 발 떨어져서 “이게 맞는가?”, “다른 경로는 없었는가?"를 묻는 존재가 되었고, 그 질문 자체가 고통이자 특권이 되었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는 그 질문을 잠시 무력화한다.
아이의 리듬, 수유의 시간, 잠의 파편화, 생존의 단순한 요구들 속에서 삶은 다시 의미 이전의 질서로 내려온다. 내가 느낀 ‘동물성’은 퇴행이 아니라,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기본 상태로의 복귀에 가까운 것이다.
섭리라는 말이 종교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와 같다. 세계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경로들이 있고, 대부분의 생명은 그 경로 위에 올라탄 채로 태어나고 사라진다. 인간만이 거기서 내려와 지도를 펴고, 방향을 의심하고, 자신이 왜 이 길에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의 순간에는 그 지도를 접어버리게 된다. “왜?”를 묻는 능력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에 정확히 반응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동물이 된 것 같았다는 느낌은 인간성을 잃은 게 아니라 인간이 되기 이전의 층위를 다시 통과한 경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출산 이전에 속했던 세계는 테드 창의 은유를 빌리자면, 명백히 인과론적인 세계였다.
삶은 쌓아 올리는 것이고, 중단은 손실이며, 내려놓음은 설명되어야 할 예외였기에 그런 세계에서 출산과 육아의 선택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런 말을 불러왔다.
“왜 굳이?”
“대체 비용은?”
“다른 방식은 없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 문제는, 출산과 육아가 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그건 ‘선택지 A vs B’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쌓아 올린 것을 전부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를 선택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다"에 가까웠다. 조금 지나치게 말하면 그 집단에서는 머리보단 몸, 능력보단 본능을 따른 내 판단이 저급한 것으로 여겨졌다. 내 출산이 또래보다 10년은 빠르기도 했고, 내가 속한 집단이 유독 능력주의 집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 괴롭고 고독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당시에 그 집단의 언어로는 해석 불가능한 삶의 신호를 내가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인간 사회에는 이런 위계가 있다.
사유는 고급, 몸은 저급.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성숙, 감정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
그 프레임 안에서 보면, “동물이 된 느낌”은 곧바로 오해를 받는다.
이성에서 미끄러졌고, 자기 인생의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무작정 ‘자기 자신’을 희생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출산, 육아를 통해 실제로 내가 들어갔던 건 문명 이전, 성취 이전, 설명 이전의 층위. 나 자신보다 큰 질서 안에 놓여 있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개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과정의 일부로서의 나를 자각하는 순간.
테드 창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면, 그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자유 의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흐름에 속해 있는가’를 아는 자유이다.
그래서 마지막 루이즈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우리는 때로 살면서 이미 경로 위에 올라와 있음을 알 때가 있다. 자신의 현재 순간이 전체 중 일부에 불과함을 인식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인과론적인 삶이 아닌 목적론적인 삶의 존재 방식에 올라와 있다. 다른 층위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다른 층위에 놓인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어느 방식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다만 세상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그래서 마치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통해 빛의 굴절의 합목적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듯이, 우리 삶의 다른 측면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역시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아름다움 중 하나가 되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