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디즈니 랜덤 일기
나의 첫 직장은, 미국 플로리다 월트 디즈니 월드이다.
이곳에서 운 좋게 인턴십 생활을 했다.
내가 뭐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뒤돌아보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곳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사진을 들춰보며 떠오르는 기억을 곱씹고 또 추억한다. 찍어 둔 사진 한 장 한 장을 보면, 신기하게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랜덤 사진에 따라오는 나의 랜덤 추억을 랜덤 일기처럼 기록해보려 한다.
만약 나의 첫 직장이 디즈니월드가 아니었다면, 아마 난 그곳에 뼈를 묻기로 작정하고 평생직장을 꿈꾸며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나. 그 당시에는 비교를 할 수 있는 사회경험이 전무했기에,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곳저곳 떠돌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아... 깨달았다. 내 첫 직장이 바로 지금까지 최고의 직장이었다는 것을.
[일단 떠나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의 10대와 20대 초. 우울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시절의 나는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꿈이 있어서 간 건 아닌 것 같다. 가족, 친구들, 학교 사람들. 모두 내가 스펙을 쌓거나 뭐 대단한 일을 하려고 가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그 간극이 꽤나 컸다. 적어도 겉모습은 모범적인 학생이자 속 썩이지 않는 맏딸이었으니. 그 누구에게도 내 속마음은 말하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우울함 따위,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지 않았다.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온 지난 날들. 성적표만 보고 나의 직업을 정해주는 선생도 있었다. 나의 흥미와 적성 따위는 고려되지 않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그런 직업들. 우왕좌왕 어른들의 뜻대로 살다가 결국은 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딱히 열중해서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냥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다.
한국을 떠나자.
일단 여길 떠나자.
반짝반짝 빛이 나는 청춘을 보내야 하는 그 어여쁜 나이에, 그냥 우울감으로 가득 찬 그런 여자애.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냥 무작정 떠나고 싶다고.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곳. 내가 당시 가장 좋아하는 게 디즈니였으니, 그냥 현실감 없는 놀이동산으로 떠나기 위해, 꿈과 희망이 있다고 떠들어대는 디즈니 인턴십에 합격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더랬다.
불합격하면 절망적일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고 그냥 한국이란 곳을 떠나기만 하면 됐었다. 너무나 절실했는지 1차 디즈니 면접관 앞에서 입에 모터를 단 듯이 영어가 술술 나왔다. 문법이 틀리건 말건 그냥 미친 듯이 나를 어필했다. 디즈니 이력서에도 팅커벨을 직접 그려서 보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디즈니라면 틀에 박힌 이력서보다 내가 얼마나 디즈니를 사랑하는지 어필하는 게 먹힐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보냈다.
이력서도 합격했다. 최종 면접만 잘 보면 이제 그곳으로 갈 수 있다. 다행히 어릴 적부터 푹 빠져있던 팝송 덕에 영어를 좋아했고, 모범생 코스프레를 했기 때문에 성적도 좋았던지 그 덕을 보는 순간이 오긴 왔다.
[디즈니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디즈니월드에서는 근무 스케줄이 새벽 shift부터~아침, 점심~오후, 오후~밤. 이렇게 3 shift 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새벽 shift가 고역이었는데, 다행히도 거의 오후 시간에 많이 배정받았던 것 같다. 일을 마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손님도 많지만, 진상 고객은 국적불문이다. 가뭄에 콩 나듯 만나는 진상고객도 익숙해지고, 업무도 익숙해진 어느 날, 퇴근길에 너무 아름다운 한 장면을 봤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순간. 바로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고 손을 꼭 붙잡고 걷고 있는 백발 노부부의 모습. 다정하게 서로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저런 모습이라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더랬다. 저런 말년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면. 그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아서... 내 시선은 노부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아직도 내 기억 속 베스트 장면, 미키 티셔츠를 입은 노부부이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왔는데, 애국심은 불탄다]
나의 절친도 디즈니월드가 맺어 준 인연이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낯선 타지에서 맺은 인연은 나에게, 우정이란 함께 알고 지낸 시간의 양 보다도 어떤 시간을 함께 나눴는지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친구와 쉬는 날이 맞으면 함께 디즈니 월드의 테마파크 곳곳을 누비며 놀았다. 디즈니 복지 중 하나는, 모든 직원이 공짜로 테마파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디즈니월드는 디즈니랜드와 달리, 테마파크가 여러 곳에 걸쳐져 있다.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놀이동산이 있는 매직킹덤, 동물원 볼 수 있는 애니몰 킹덤, 쇼핑센터가 모여있는 다운타운 디즈니, 영화 촬영 장소 등을 볼 수 있는 디즈니 할리우드 등 테마파크, 워터파크 등 종류도 다양하고 굉장히 크다. 디즈니월드에 가면 'Epcot'이라는 테마파크도 있는데, 가을 시즌엔 세계맥주 축제가 있었고, 나라별 먹거리 축제도 열렸다. 내가 근무할 당시에 한국 부스가 처음으로 생겼던 것 같다. 어찌나 반가워했던지. 세계 곳곳의 테마를 주제로 꾸며진 멋진 건축물들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특히 아시아 섹션의 일본관 중국관은 으리으리했다. 한국관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어찌나 화딱지가 나던지. 푸드 축제에 'South Korea'가 적힌 이 작은 음식부스 하나 생겼을 뿐인데, 너무 반가워서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놨다. 하지만 음식은 역시나 아쉬웠다. 외국인이 만드는 한국 음식이라니!!! 코미디였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그래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많이 느꼈다. 다만 한국과 가장 다르다고 느낀 것은, 정말 그들은 남의 시선 따위 정말 신경 쓰지 않구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I don't care'. 하지만 그들도 '정'이 있다. 디즈니는 직원들의 손재주가 좋다. 아무래도 회사가 디즈니이다 보니, 미술과 디자인 학도들도 많이 있었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사진처럼 생일 때는 직접 쿠키를 만들어서 휴게실에서 나눠먹기도 하고, 꼭 먹을 것을 챙겨주고. 동료들에게 따뜻함을 많이 느껴서 좋았다. 그 못된 프랑스 여자애랑 멕시코인지 어딘지 스페인어 쓰던 그 질투심 많은 여자애만 빼고.
디즈니에는 정말 지구촌 곳곳에서 온 수많은 인종과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좁은 시야로 살아왔는지, 얼마나 편협한 생각과 고정관념, 편견 속에서 살아왔는지 몸소 느끼고 머리에 돌을 제대로 맞고 온. 너무나 소중하고 뜻깊은 깨달음을 많이 얻었던 시간이었다. 디즈니에 오기 전엔 부모님의 기대,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게 있다 해도 숨기기에 급급했다. 남들이 열광하고, 다수의 사람이 좋다고 하는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루트, 성공적인 삶'이 정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일지 처음으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기이다.
게이 친구도 있고 레즈비언 친구도 있고,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빵을 못 먹고 쌀을 먹는 미국인 친구도 있으며, 싱글맘 싱글대디, 눈동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친구 등 온갖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 사실들을 꽤나 유쾌하게 나에게 설명해줬다. 정말 쿨했다. 멋있었다. 힘들기도 하지만, 그게 자신들의 삶이라고 했다.
[플로리다 여름의 미친 습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플로리다를 7월 경 갔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사우나인 줄 알았다. 안 그래도 목욕탕을 가면 현기증이 나고 숨이 턱턱 막히고 빈혈 증세까지 보이는 나는 정말 이런 날씨에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온도도 온도지만, 습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났다. 하지만 인간이 참, 이게 또 적응이 되더라는. 어떻게 지내야 하나 정말 걱정하고 고민했었는데,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생존력과 적응력에 감탄했다. 플로리다의 매력은 바로 겨울이다. 반팔을 입고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가을 겨울은 정말 날씨가 꽤나 좋았다. 미국인들이 추위를 피해 겨울을 플로리다에서 보낸다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케빈네 가족도 크리스마스를 플로리다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류별 콜라는 다 마셔본 듯]
살면서 콜라는 치킨을 먹거나 피자 먹을 때만 조금씩 먹었는데, 사실 나는 콜라보다도 사이다 파인데. 디즈니에서 일하면 콜라는 그냥 무한리필 공짜로 계속 마신다. (이걸 직원 복지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이어트 코크, 제로 코크, 체리코크 등 콜라를 종류별로 다 마셔본 것 같다. 물보다 콜라를 더 많이 마시는 사람들. 제로콜라든 다이어트 콜라든 그냥 다 설탕 덩어리 물일 텐데 살이 안 찔 수가 없는 음식들만 골라서 먹는다. 디즈니에서 내 평생 마셔야 할 콜라를 다 마시고 온 것 같다. 동료들이 모두 콜라에 얼음 넣어서 먹고 있으니 나도 괜히 따라 마시고 싶고, 점심시간에 휴게실에서 도시락 까먹으면서 많이 먹었던 것 같다. 물론, 한국에 돌아와서 콜라는 거의 안 마셨다. 탄산음료를 원래 싫어하는 나인데 왜 그리 마셔댔는지? 디즈니 생활 중 무려 몸무게가 8kg이나 쪘는데, 콜라도 어느 정도 그 원인에 상당한 지분이 있겠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