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의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시 쓰는 김소연입니다"하고 내 소개를 한 데에는 작은 의지가 담겨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인은 안 하고 시만 쓰며 살겠다고 말해왔다. 내가 꿈꾸던 시인은 아직 멀었다 하는 마음이 절반이고, 시인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절반이다.
-김소연, 자기소개 시간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얼마 전, 벼르다 안과를 갔다. 하드렌즈를 곧잘 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퍽퍽하고 초점도 명확히 맞지 않아 자꾸 과하게 피곤해졌다. 본의 아니게 안경을 쓰는 시간이 늘다 보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콧잔등으로 안경이 자꾸 미끄러져 내려왔다. 자주 가는 카페 주인도, 세탁소 사장님도 안경 쓴 날 못 알아봤다. 그럴 수밖에. 워낙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쓰면 난 영락없는 '고시생'이다.
이유야 뻔했다. 노트북, 책을 들여다보느라 눈을 혹사시킨 것,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노. 안.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내게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글 써요." "아..." 의사는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더는 묻지 않았다.
보통 이럴 땐 '직업'을 말한다. 그런데 '기자'도, '작가'도 아니고. 글을 쓴다니. 글 쓰는 인간이 어찌 생겼나 의사는 다시 쳐다봤겠지만 주고받는 대화 속에 순식간 튀어나온 내 대답을 며칠 동안 스스로 대견해했다. 글 써요. 전 글을 씁니다. 크.
나 역시 내가 꿈꾸던 기자의 모습을 이루기 전에 멈췄고, '기레기'라 욕먹는 기자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단독 출간을 하지 않았으니 대중이 말하는 '작가'라는 인식과 내가 '진짜 작가'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오묘한 차이를 고심하다가 의사에게 답한 건 결코 아니었지만, 아무튼 쓰는 행위를 존중하고 의미를 부여했다는 건 적어도 나 스스로 '쓰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쓰는 일'을 어려워한다. 그냥 쓰면 되는데 그걸 참 못 한다. 기가 막힌 글을 쓰고 싶어서, 아무거나 쓸 수 없다고 제한을 둬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 고매한 선비 같다고나 할까. 쓰는 일을 고귀하고 드높게만 여기려하는 지적 허영 말이다.
생활은 어째서 시에게서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세계가 되어 있는 걸까. 생활이 곧 자부이자 자랑인 세계는 평범하기만 한 걸까. - 김소연, 생활 <나를 뺀 세상의 전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글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다. 땅에 발을 붙여야, 리얼리티가 살아서 공감도 얻는다. 별 성찰 없이 멋들어진 문장은 공갈빵 같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럴듯한 소재와 특별한 경험을 찾겠다는 이유로 글쓰기에 게을렀다.
지극히 평범해서 지극히 특별한. 평범한 내 생활이 지극히 특별한 글이 되는 건 작가 말대로 '빛나는 경험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이 글자를 덧입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