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빨리 쓴다는 것

by 오르
그의 수필의 소재는 다양하다. 그는 무슨 제목을 주어도 글 다운 글을 단시간에 써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하나 보다.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이 그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그가 타고난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 그리고 그 기억력의 산물이다.
(치옹, <인연> 피천득)


'글 다운 글'을 단시간에 써낼 수 있는 역량.

부럽다. 뚝딱.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글 한 편 뚝딱 지어내는 능력. 예전부터 얼마나 바랐던 능력인고.


소싯적, 모 신문사 필기시험 보러 갔을 때다.

시사상식, 그리고 논술. 언론고시생의 덕목은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을 완결하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완성되지 않은 글은 의미 없다.


잘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 글 구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터라 늘 논술 시간은 부족했다.

그날도 그러했다. 초반 시간 배분에 영리하지 못했다. 게다가 꼭 입사하고픈 곳이었다. 고득점 논술에 대한 욕심이 부풀어 올랐다.


딩동.

헉.


종이 쳤다. 글 마무리는 덜 됐다. 시험 감독이 다가온다. 얼굴에 철판 깔고 끝까지 쓴다. 내 앞에 섰다. 그래도, 모르는 척. 미친 듯이 볼펜을 휘날린다.


감독관이 시험지를 쥔다. 난 뺏기지 않겠노라 끝까지 잡고 쓴다. 몇 초간 실랑이 끝에, 휙.

그는 내 시험지를 잡아챘다. 아직 끝 문장도, 마지막 마침표도 찍히지 않은 글인데 내 손을 떠났다.


기자가 돼서도 글쓰기는 늘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좀 더 잘 쓰고 싶은 마음, 내 이름 달고 나가는 글이 보다 더 글 답기를 바라는 마음. 시곗바늘은 야속하게 돌았고 머리는 쥐가 난 듯 빳빳해졌다. 아마 내게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이 농축됐더라면 글을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하는 시간이 줄었을 테다.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이 버무려졌다면 글로 이미 세상을 뒤집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글 쓰느라 시간을 보내며 시곗바늘이 더디 가기를 바란다.

할 일도 많은데 글 쓸 땐 유독 시간이 빨리 간다. 글을 쓰면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건전지를 빼면 바늘이 멈춰버리듯, 글 쓸 시간도 그리 멈춰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글을 마무리해놓고 더 고쳐야 하나, 한참을 바라보다 시계를 쳐다본다. 이미 세상 시간은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을 읽으며 그날 시험지를 뺏기고 집에 돌아와 눈물로 자책했던 일이 떠올랐다. 논술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시험지를 매섭게 낚아채던 그 감독관의 손, 차갑게 돌아서던 뒷모습은 여전히 생생하다.


뉘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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