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처럼 내 귓전을 맴돈 말

빨강 머리 앤_루시 모드 몽고메리

by 오르


할아버지는 큰손녀를 예뻐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했던 시절, 큰며느리인 엄마는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 서운했지만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큰손녀는 아들만 여섯인 집에 첫 여자아이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난 꼭 할아버지 옆에서 잤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지금도 가끔 이렇게 말한다. "내 옆에서 잘 놀다가도 잠들고 싶으면 베개를 들고 지 할애비한테 갔어. 네가 그랬어."


외가 식구들은 늘 내가 딸이라는 사실을,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쉬워했다.

저게 아들이었으면 좀 좋아.

엄마는 장손을 낳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한 노력 끝에 마흔이 다 돼 늦둥이 아들을 낳는데 성공했다. 내 나이 열두 살 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은 그저 고맙고 예뻤다. 할아버지도 마침내 장손을 보고 기뻐했다. 하지만 내게 주는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당시 고가인 피아노를 사준 것도, 고등학교 시절 일본 캠프를 보내준 것도, 대학생이 돼 첫 휴대폰을 사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내 대학 등록금이 모자라면 작은 아빠들 몰래 엄마에게 슬며시 돈을 보내기도 했다. 엄마가 탐탁지 않아했던 남편을 '세상 어디 가도 찾을 수 없는 훌륭한 손녀사위'라며 흔쾌히 승낙한 것도 할아버지였다.


버림받고 외로웠던 '빨강 머리 앤'은 매슈 아저씨 덕에 초록 지붕 집에 살게 됐다. 아저씨는 여자와 눈을 못 마주칠 만큼 수줍고 과묵했지만 앤에게만은 살갑고 따뜻했다. 평생 애정 표현에 서툴렀던 그지만 어엿한 숙녀로 자란 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쎄다. 남자아이 열두 명을 준대도 너와 바꾸지 않을 게야, 앤. 잊지 마라. 남자아이 열둘보다 네가 나아. 에이버리 장학생이 남자아이는 아니었지, 아마? 여자아이였는데,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 말이다.

빨강 머리 앤_루시 모드 몽고메리 / 더 모던


원래 초록 지붕 집에는 남자아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앤이 자신이 남자아이였으면 아저씨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자, 아저씨는 진심을 다해 이렇게 답한다. 앤을 행복하게 만든 이 말은 아저씨가 앤에게 남긴 유언이 됐다. 아저씨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고통과 흥분 속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앤을 통곡하게 만든 것도 이 말이었다.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


"00 왔냐."

내가 찾아가면 할아버지는 꼭 이렇게 나를 맞았다. 자신이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나를 정겹게 불렀다. "00이냐, 00 왔냐." 할아버지가 소천했을 때 가장 많이 내 귓가를 맴돌던 말도 그랬다.


00 왔냐.


할아버지에게 수많은 말을 듣고 자랐지만 유독 그 음성이 떠올라 장례 내내 눈물을 쏟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수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이 말이 귓전을 울린다. 내가 이토록 잘 자란 건 여느 집 장손 못지않은 사랑을 할아버지에게 받은 덕일 게다. 앤이 매슈 아저씨의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