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두 아들은 엄마를 참으로 자주, 많이 부른다. 여느 집 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내가 움직일 때마다, 돌아설 때마다, 심지어 낮잠 잘 때마다 날 부른다. "엄마, 자요?"
하도 불러대서 방학이면 하루에 딱 3번만 엄마를 부를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하루 종일 '엄마', '엄마' 날 찾는 통에 넋 놓고 쉴 틈도 없어 내린 고육책이었다. 효과는? 당연히 없었다. 둘째 아들은 이미 세 번의 기회를 다 쓰고 날 이리 불렀다. "000 씨!"
아이들은 엄마의 어떠함보다 자신들의 기분과 필요가 우선이다. 엄마가 일하고 있어도 상관없다. 그저 눈에 보이면 부르고, 눈에 안 보이면 온 집을 돌아다니면서 부른다. 웬만하면 반갑게 대답해 주는데 일할 때만큼은, 글 쓸 때만큼은 그러지 못한다. 글 쓰느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가 애들이 "엄마" 부르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문장 하나 마무리가 안 되고 다시 뒤로, 또 뒤로 돌아가기를 무한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할 때도 있다. 남편은 애들이 불러도 모른 척하고 글 쓰라는데 그게 안 된다.
원고 마감이 코 앞일 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아이들이 "엄마" 부를 때마다 "잠깐만, 저리 가. 엄마 바빠. 이거 마무리해야 해. 엄마 오늘 마감이야. 좀 이따가."라는 말이 연거푸 쏟아진다. 급기야 저녁때가 지나 배고파서 날 찾을 때도 "곧 끝난다고. 끝나야 밥을 먹지. 저리 가서 기다려!"라고 소리 지른 적도 있다. 아이들이 10살, 8살이 되기 전까지 이리 했으니 어린아이들에게 해도 너무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울컥한다. 엄마가 끝날 때까지 주린 배를 움켜주고 기다렸을 아이들. 이제는 이에 훈련이 돼서 내가 일할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 때로는 그게 더 마음 아프다. 그저 미안하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미안한 마음은 두고두고 남는다. 원고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니 내가 책임져야 했고, 프로답게 일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남에게 욕 먹기 싫어서, 내 이름에 먹칠하기 싫어서 그리 했지만 정작 내 아이들에겐 상처가 됐을 거다. 그게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이어령 교수는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에서 딸이 잠자기 전 인사를 건네도 글 쓰느라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손만 흔들었다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딸에게 굿나잇 키스를 정답게 하지 않은 기억이 사무쳐 그는 이 책을 썼다.
아무리 바빠도 삼십 초면 족하다. 사형수에게도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고 땅을 볼 시간은 주어지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눈 한 번 깜박이는 순간이면 된다. 그런데 그 삼십 초의 순간이 너에게는 삼십 년, 아니 어쩌면 일생의 모든 날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먼저 하늘로 간 딸에게,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든 딸에게 살아서 다 하지 못한 마음을 담아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다시 그 삼십 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펼' 것이라고, 천장에 닿을 만큼 딸을 안아 올리고 뺨에 굿나잇 키스를 해 줄 거라고 말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녀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 불러대는 건 때로 귀찮기 그지없지만, 이 역시도 곧 끝날 거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빈 방 가득 아련하게 울리기 전에 오늘 딱 삼십 초만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