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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Feb 24. 2024

할머니, 그래도 아직은 아니에요

서너 살 아이만큼 작아진 아흔일곱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수년째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고관절을 다친 이후 거동이 불편해졌다. 하루종일 침대에 몇 시간이고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난해 말부터는 그저 누워만 있는다고 했다. 할머니를 본 게 지난 추석이었다. 나만 보면 그리 좋아하는 할머니인데 바쁘다는 이유로 올해 음력설이 돼서야 잠시 들렀다. 침대에는 서너 살 됐을 아이가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평생 15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은 키로 살았다. 많이 넘어지고 다쳤다. 팔과 다리가 짧아서 그렇다고, 전쟁통에도 빨리 도망가지 못해 동네 못된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았다고 원망 섞인 옛날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불에 폭 덮인 할머니는 내가 알던 모습보다 더 자그마했다. 얼굴은 주먹만 해졌고, 핏기 없는 하얗고 얇은 피부엔 굵고 가는 주름이 가득했다. 뺨은 깊게 파였다. 할머니는 힘겹게 눈을 떴다.


할머니의 동그란 두 눈은 늘 반짝거렸는데 이제 그 눈빛을 볼 수 없다. 눈빛이 흔들린다. 얘는 도대체 누구야. 낯설어진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할머니,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네." 죄송하고 머쓱해서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저렇게, 할머니가 나를 인지할 수 있는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 내 이름을 말하고, 옆에 선 엄마를 힌트 삼아 "여기, 할머니 큰며느리의 딸"이라 말하고, 빛바랜 대학 졸업사진을 들어 “얘가 나예요, 할머니”라고 말한다. 아, 또 뭐가 있지? 머리를 굴리는 찰나, 할머니의 작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이고..." 쪼글쪼글한 두 손을 꺼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할머니가 웃는다. 비로소 날 알아봤다.


할머니의 작은 몸을 쓰다듬고 할머니 눈을 맞추고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건 몇 년 전까지 할머니가 내게 했던 일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그럴 수가 없다. 아이처럼 작고 아이보다 힘이 없어진 할머니를 어른이 된 큰 손녀가 끌어안는다. 할머니가 날 이렇게 예뻐했던 것 알아요. 날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 다 알아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내가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할머니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게다.


멀찍이 서 있던 남편과 두 아이를 할머니에게 인사시켰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나는 것처럼. 할머니가 세 남자를 기억할 리 없다. 할머니 기억 속 아이들은 꼬맹이일 테니까. 그마저도 점점 흐릿해져서 막연한 실루엣만 남아있을지 모른다. 할머니는 손주사위에게 깍듯했다. 몇 마디 건네지 않았고 그마저도 말을 놓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선 찾기 힘든 덩치 큰 다른 집 자식이 어려웠나. 우리 집 식구들 중에서 남편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마음에 들어 한 건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눈이 감긴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된 듯하다. 할머니가 좋지만, 자그마해진 할머니가 안쓰럽지만, 할머니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가 없다. 어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르는 그때, 열여덟 살 큰아이가 나선다. “제가 성경 말씀을 읽어드릴까요?” 두 아이들은 말씀을 외워 할머니에게 들려주곤 했다. 평생 다니던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된 할머니에게 두 증손자가 건네는 재롱이었다. 큰아이는 휴대폰 성경 애플리케이션에서 말씀 몇 구절을 찾아 읽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마지막 기도도 큰아이에게 부탁한다. 큰아이는 의젓하게, 또박또박 할머니를 위해 기도한다. 남은 시간 평안하시기를, 잘 견디시기를, 천국 가기 전 기쁨과 소망이 할머니에게 가득하기를.      


아흔일곱이 된 나의 할머니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걸, 언젠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불현듯 슬퍼져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어릴 적 초인종을 누르고 “할머니!”를 부르면 할머니는 덧신 신은 발로 종종거리고 나와 문을 열어줬다. 내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았다.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엄마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가슴이 자꾸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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