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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Feb 04. 2024

이런 세 남자와 삽니다

민망한 팔불출 이야기

오늘도 둘째가 얼굴을 들이민다. 강호동 뺨치게 큰 얼굴에 머리는 추노처럼 산발을 하고. 내가 가는 길을 막아선 채 말라서 갈라진 입술을 쑥 내민다. "저리 가. 엄마 바쁘단 말이야." 피해서 도망갈 수도 없다. 우리 집 복도는 광활하지 않아서 둘째의 단단한 몸이 꽉 찬다. 응. 못 이긴 척 메마른 입술에 뽀뽀한다. 찌릿. 공기도 피부도 건조한 겨울, 엄마와 아들 사이에 정전기가 인다. ", 아들, 벌써 열 번은 더 했어. 오늘은 그만." "엄마, 고마운 줄 아세요. 세상에 엄마한테 뽀뽀해 주는 열여섯 살 중3 아들은 없어요." 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둘째는 곰살 맞고 눈치가 빠르다. 숙제하다가도 세탁기와 건조기가 끝나면, 식기세척기 알람이 울리면 재깍 일어나 기계 문을 열고 다음 스텝을 행한다. 엄마 취향도 온전히 파악해서 학교에서 누군가 준 브라우니를 먹다가 반을 남겨 온다. 엄마가 좋아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또 한마디 한다. "엄마, 그거 내가 먹고 싶은 건데 참고 가져온 거예요. 다 먹지 말고 반은 남겨놔요."


첫째는, 음... 밋밋하다. 마른 나무토막 같다. 대신 그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얼굴에 생각이 가득해서 쳐다보는 맛이 있었다.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것이 우수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이 뽀얗고 갸름해서 깊이 생각에 빠져 있는 모양새가 어울렸다. 쌍꺼풀 없는 눈에 오똑한 콧날. 미소는 고왔고 환히 웃을 땐 빛났다. 몸도 날렵하고 공도 잘 차는데 읽고 쓰고 배우는 걸 재미있어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은 "유학 보낼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서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지덕체가 균형 있게 성장'하는 교육환경에 어울릴 아이라며. 요즘엔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어설프게 아이돌을 따라 하는지 촌스럽지만 어미에겐 아이 본연의 모습을 홀로그램처럼 떠올려 보는 능력이 있기 마련이다. 난 안다. 스무 살이 되면 첫째는 어릴 적 멋짐을 다시 장착할 것을.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남편이 놀린다. "아이고, 눈에서 꿀 떨어진다. 침 닦아라."


남편은 집안일의 대가다. 나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그는 부엌살림을 전담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반찬 여섯 개를 만들었다. 갈수록 손맛에 물이 올라 음식을 먹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냉장고에 채워할 식재료도 나보다 더 잘 안다. 이전엔 그가 요리하면 부엌 전체가 엉망이 돼서 뒤처리하는 게 더 일이었다. 지난 18년간 내 잔소리를 필수 영양제처럼 먹고 산 남편은 이제 요리 후 인덕션 상판을 닦고 그릇은 바로바로 설거지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가장 센스 넘치는 포인트는 잠들기 전, 내 자리에 전기요를 깔고 불을 지피는 것.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를 위해 자신이 먼저 이부자리를 정돈한 후 재빠르게 전원을 켠다. 오들오들 시린 몸을 침대 속에 누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역시 당신이 최고야. 당신밖에 없어." 노골노골 몸이 녹으면서 온갖 칭찬이 다 나온다. 다만, 그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으니 빨래를 '지 멋대로' 한다는 것. 분명 수건과 속옷과 흰 빨래, 색깔 빨래는 구분하라고 장문의 카톡으로 정리해 줬는데 오늘도 그가 돌린 빨래더미에는 속옷과 양말, 카키색 트레이닝복이 함께 있었다. 그가 애쓰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으니 괜찮다. 걸레를 같이 넣지 않은 게 어딘가.


아들 자랑하고 남편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옛말에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자랑할 건 우리 집 세 남자 밖에 없다. 큰 이벤트 없이 사소하게 시시때때로 나를 웃기는 존재는 그들뿐이다. 사실 조금 더 생각하고 한없이 쓰자면 이제껏 쓴 양의 세 배는 더 쓸 수 있다. 하지만 겸손이 미덕이므로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아름다울 듯싶다. 아니, 이미 지나쳤다... 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남편이 묻는다. "재미있었나? 오늘 내 이야기는 뭘 했어?" 아니, 당신 이야기를 왜 해. 사람들을 만나면 세 남자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할 수 없다. 칼 맞기 십상이다.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입을 닫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도배한다는 SNS에도 올릴 게 별로 없다. 내 일상은 매우 단순하고 살림은 소박하다. 수입차를 타거나 명품 쇼핑을 하지도 않는다. 가족들은 집돌이고 해외여행을 갈 만큼 모아둔 여유자금도 없다. 포토제닉한 사진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할 건 그들밖에 없어서 아주 가끔 주체할 수 없을 때만 SNS에 올린다. 지난주 첫째 아이의 미담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데  여전히 고민 중이다. 아이들은 자꾸 크는데, 남편 머리숱은 자꾸 줄어드는데, 나중엔 내 기억력이 감당하지 못할 텐데. 나머지는 그냥...일기에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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