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 있는 날이 1년뿐이라면

마흔 중반, 죽음을 생각하다

by 오르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마흔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나는 한창이라는 생각, 여전히 내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을 인지하며 사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눈물이 왈칵 솟는다.


얼마 전 뵌 시어머니는 갑자기 늙은 할머니가 됐다. 빙판길에 넘어져 눈 주변은 부풀어 올랐고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염색하지 않고 머리카락이 자라도록 그대로 둔 탓에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내가 기억하던 시어머니는 큰아들 내외가 찔러 드리는 용돈도 밀쳐내며 두 손자를 열성으로 봐주던 분이다. 매일 아침 운동을 다니며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연성 좋은 ‘왕언니’로 불리던 분이다.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내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그때가 어느 때건 내가 원하는 때보다 빨리 닥쳐올 거다.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거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생 복잡했던 머릿속이 더 엉켜 들기 시작할 테지. 아니, 오히려 단순해질지 모른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이 먼저 떠오른다.

늘 나만 보면 "사랑해요"라며 뽀뽀 세례를 퍼붓는 세 남자들. 그간 모질게 했던 말들, 속상하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끝없이 쏟아부을 게다. 그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다시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게다. 가는 시간이 아까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리고 글을 쓸 거다.

더는 미루지 않고. 책 집필에 속도를 내야 한다. 이 책이 팔릴까. 사람들에게 먹힐까. 이런 걱정과 근심이 한순간 먼지처럼 가벼워질 거다. 내가 경험한 소중한 것들,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들을 종이 위에 아낌없이 쏟아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전해야 한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수많은 여자들 -엄마, 아내, 딸, 며느리에게 말해줘야 한다. 우린 가진 게 많다고. 인생에는 수많은 길과 문이 있어서 한쪽이 닫히면 다른 쪽이 스르륵 열리니 두려워하고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말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시간이 있다.

어쩌다 보니 글을 쓰게 됐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글을 썼다고 늘 생각했다. 기자 시절, 만났던 한 임원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 참 아까워요. 그리 똑똑한데 너무 좁은 곳에 많이 몰려 있어요. 다른 영역에서 더 생산적인 일을 하면 좋을 텐데.”

그의 본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기자일에 만족도가 높지 않았던 나는 일면 동의했던 기억이 난다. 기사를 좀 더 잘 쓰던가, 그게 아니라면 난 더 생산적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기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보니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됐다. 글을 쓴다는 게 인간으로서 얼마나 값진 일인지,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를.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쓴 폴 칼라니티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 판정을 받았다.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 생물학, 의학을 공부했다. 총명하고 능력 출중한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각 대학에서 최고의 자리를 약속하며 러브콜을 할 때였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쉬울 텐데요.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


실제 그는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라고 한다. 숨 쉴 틈조차 없는 레지던트 시절에도 자정이 넘는 시간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글쓰기로 밥벌이했다고 하면서 글쓰기를 목숨 걸 만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난 없다.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그 말이 자꾸 귀에, 마음에 걸린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가족들.

이만으로도 가진 게 넘친다. 그런데 왜 그토록 남이 가진 떡만 바라보고 부러워했을까. 목표를 향해 묵묵히 한발 한발 내딛는 거북이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옆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토끼들을 바라보느라 의기소침했다. 귀 펄럭거리는 토끼들에 정신 팔려서 내 사명을, 비전을,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시간들이 부끄럽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하려 애쓸 거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들을 하고 사느라 정작 중요하게 한 일이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생각하다 문득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사랑하고 섬기고 나눈 일이 떠오른다면 행복할 게다.


부정적인 마음 털고 그저 오늘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리라. 뇌에서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이 손상되면 인간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영원히 빼앗긴 채 우리는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언어가 없는 삶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내 글쓰기가 겨우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자조했던 일들을 뒤로하고 그저 글을 쓸 뿐이다. 나약하고 무력함을 느낄수록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글을 쓰려한다. “그날이 도둑같이 온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늦기 전에. 진정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