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잔고가 바닥났다. 연말연시는 잔혹하다. 추운 겨울 운신의 폭을 좁혀 방구석에만 붙어 있었는데 틈틈이 껴있던 졸업식, 설 연휴, 갑자기 다녀와야 했던 장례식 여파가 남았다. 아이들이 방학 기간 신청해 놓은 온라인 수업에도 돈이 쏠쏠치 않게 나갔다. 모두 미국 현지에서 제작된 수업이다. 공부하겠다는데 뭔들 못해주겠나. 기특해서 덥석 신용카드를 내밀었는데 한 달 후 원화로 환산된 청구금액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솟은 환율이라니. 게다가 고3인 큰아이가 시험 대비용 학원을 다니고 싶단다.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압구정동 학원 세계는 요지경이다. 수업료 평균 단가가 내 상식을 배로 뛰어넘는다.
타고난 금수저는 아니어서 살면서 갑자기 자금경색이 일어났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는 걸 보면 당시에도 어찌저찌 넘긴 모양이다. 때마다 채워지는 곳간에 감사하며 배짱 두둑하게 지내온 시간이 놀랍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진다. 지혜로운 재테크와 계획적인 재정 관리로 돈을 쌓아놓고 살까. 어제까지 평안했던 마음에 찬바람이 분다. 통장 속 숫자만 줄었을 뿐 변한 건 없는데 집구석이 하루아침에 군색해 보인다. 그렇다고 앞으로 필요할 게 분명한 돈을 임시방편으로 함부로 꺼내 쓸 수도 없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다가 그나마 쌓은 공든 탑마저 무너질라. 숨 쉴 때마다 돈이 술술 빠져나가는 세상, 돈 쓸 일이 수두룩한데 아…난감하도다.
마음이 가난해진 자는 달라진다. 욕구에 충만한 즉흥적인 소비활동을 멈춘다.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한다. 냉장고 깊이 쟁여놓은 재료를 찾아 머리를 굴린다. 요리에 젬병이어도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먹고 싶은 음식이 바뀐다. 선택은 없다.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 집 정리를 한다. 이곳저곳에서 받은 선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고도 쓰지 않은 나태함을 책망한다. 부지런히 꺼내 정리한 후 쓸 것을 제 위치에 둔다. 더는 우리 집에 필요 없는 것들은 떠오르는 그들에게 나눈다. 빈곤해진 자는 숫자에 눈을 뜬다. 같은 양이라면 가장 저렴한 야채를 골라 담는다. 필수 식재료란 없다. 가성비 높은 것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 정가 옆에 빨갛게 표시된 할인율을 따라 손을 뻗는다. 현명한 주부 생활이 비로소 이뤄지는 현실. 평소에 이렇게 살았으면 좀 좋아.
돈은 언제나 들고 난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내게로 흘러들었다가 필요와 욕구를 저울질하며 소비, 투자, 기부의 형태로 흘러간다.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낙숫물처럼 나가면 좋으련만 들어오는 일은 야박하고 나가는 일에는 손이 커진다. 인생 주기에 따라 돈이 들고 나는 규모는 다른데 아이들이 한창 자라고 공부하는 지금이야말로 춘궁기다. 머물기가 무섭게 이내 다른 곳으로 유유히, 숭덩숭덩 빠져나간다. 현금 쥐는 일이 많지 않은 요즘, 결국 돈은 통장과 카드명세서, 가계부의 숫자로 존재한다. 늘었다 줄었다 숫자 놀음에 희비가 엇갈린다. 무한하지 않은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근검절약하여 제대로 흘려보내야 한다. 진정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해 아껴 모으는 일. 어린아이도 알 법한 삶의 이치를 어려움이 닥쳐야 알아챈다. 아직 살 날이 남았으니 더 늦기 전에 알뜰하고도 풍요롭게 살아보리라. 당분간 아이들의 미래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노후 자금은? 다시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