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와 그녀

당신 다음엔 무엇 14

by 강윤미
랭보와 그녀.jpg 그림 metaphor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는 시를 좋아했다. 나 역시 시를 좋아해서 문예부 활동을 열심히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시를 읽고 시를 말한다는 점과 나는 시를 모르고 시에 귀 기울인다는 것. 그녀는 말이 거의 없고 조용한 편이어서 주변에 친구들이 별로 없었고 나는 처음에는 낯을 가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용한 친구, 활발한 친구들을 두루두루 사귀는 편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운동장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 날 내게 그녀가 ‘랭보’를 말했다. 나는 ‘랭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녀가 혼자 책상에서 시를 쓰기도 했는지 시를 읽기만 했는지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문예부이고 시를 좋아하고 쓴다고 자부하던 내게 랭보를 처음 알려준 그녀를 나는 조금 선망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은유와 시적 허용 등의 정답을 알기 위한, 밑줄 긋고 외워야 하는 시가 전부였다. 시의 다른 얼굴은 만나지 못했다. 내 시야는 좁은 교과서 안에만 머물러 있었고, 나를 포함한 문예부 친구들은 백일장에서 정해주는 주제로 시나 산문을 썼을 뿐이다. 나는 교과서에 있는 시인 말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들이 쓴 시가 세상에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에 대해, 시인에 대해, 시를 장식하는 언어들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문예부는 모범생들이 얌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특별활동으로 적합했고 시의 민낯을 궁금해하는 문예부 친구는 없었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싶었다. 시화전을 위해 쓴 시를 문예부 담당 선생님이 빨간 사인펜으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쭉쭉 그어 놓았을 때 마음 아팠다. 다정하게 시가 무엇인지 말해주지도,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그저 빨간 줄을 긋고 돌려주면 끝이어서 속상했다. 소심한 나는 작고 사소한 반발심을 몰래 품고 지냈다. 문예부에서 의례적으로 가는 백일장 말고 전국 단위의 큰 대회를 찾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시와 산문을 썼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시를 이야기해줄 어른을 찾아 무작정 편지를 썼다. 내 글과 편지는 내 몸보다 먼저 섬을 건너갔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열아홉의 봄에 다짐하고 이듬해 섬 밖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자취방에서 현존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처음 읽기 시작했다. 읽어야 할 시집이 많아서 덜 적적하고 덜 고독했다.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백 명 가까이 되는 대학교 학부 동기생 중에 랭보를 알려줬던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부탁으로 그녀가 수업에 늦거나 빠질 때마다 출석 체크 때 그녀 대신 “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졸업 후에 알게 되었다. 출석 체크를 해준 것 외엔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입학 동기일 뿐인데, 소식을 듣고 이상한 소용돌이가 마음에 일어 나지막이 랭보를 이야기했던 동명이인 친구가 생각났다.


그녀는 폴 세잔의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을 그려서 내게 주었다. 턱을 괴고 무언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그림 속 소년이 그녀 같다. 그녀 같아서 색이 빛을 잃지 않고 아직 빛난다. 나는 시를 잃지 않으려 버둥거리고 있는데, 짧은 곱슬머리 친구는 무엇을 손에 쥐고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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