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49
라디오에서 처음 들은 음악에 마음이 흠뻑 젖어 들었을 때, 나는 음악의 집을 찾는다. 디제이가 알려주는 곡명과 가수의 이름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선곡표에 들어가 정확한 이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음악이 세 들어 사는 집에 노크한다. 세상에 나온 음반 중 어떤 음반에 그 곡이 살고 있을까. 온라인 음반 판매처에서 확인한다. 품절. 왜 좋은 것은 뒤늦게 알게 되는 걸까. 몇 년 전에 나온 음반이지만 품절. 나는 생각한다. 이토록 황홀한 음악이 세상에 나와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뭐 하고 있었을까. 음반이 나온 그해에 나는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었나. 음반 발매의 시작점과 품절의 시작점. 그 간극을 채우지 못해 밤은 온통 아쉬움에 까맣게 타들어 간다. 온라인 판매처에 ‘재발매 알림 설정’을 해놓는다.
음반이 없다고 해서 그 음악을 영영 듣지 못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꼭 소장하고 싶은 음반을 만나는 것은 계절의 흐름을 어찌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연약함 때문에 감성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오르락내리락한다. 겨울 감성은 눈을 그리워한다. 나는 겨울이면 <러브레터>를 본다. 어린 나의 무릎까지 닿았던 눈의 차가움. 차가우면서 소스라치게 황홀했던 겨울이라는 커튼. 내가 살았던 고향 마을은 눈이 깊이깊이 쌓이던 중산간 마을이었다. 나의 마음 아주 맨 밑바닥에 눈에 대한 인상이 화석처럼 박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에 있는 두 눈은 영화 속 눈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간다. 산에 있는 연인에게 잘 지내냐는 인사를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을 연인에게 가장 큰 소리로 안부를 보내는 마음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사실, 그대 없이도 잘 지내고 싶은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내게 한 달 동안 살아볼 수 있는 자유와 여건이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탈리아 피렌체로 갈 것이다. 두 사람이 되어 신혼여행으로 갔었고 세 사람이 되어 다시 갔던 피렌체. 피렌체가 그리운 날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본다.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오후.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르던 두오모. 영화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피렌체의 풍경은 내게 아직 딸이 하나였던 삼각형 구조의 세 식구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 식구여서 아직 나는 서툴렀고 분주했다. 네 식구가 되어 사각형의 구조가 되면서 나는 내 안의 아늑함을 조금씩 찾고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두 아이를 두고 잠깐이라도 카페에 가서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을 때, 같은 부분에서 틀리던 첼로 연주자는 두 사람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긋난 인연으로 두오모에서 재회했을 때 완벽한 연주를 선보인다. 첼로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보았던 새벽. 나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앉은키만큼 되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슬픔과 고독함, 어여쁜 고뇌는 앉은키를 넘지 못하도록 악기가 올망졸망 붙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앉은키를 넘은 첼로 소리는 악기의 몸통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몸통 안에서 자신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첼로가 좋은 소리로 연주자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이다. 첼로는 아주 깊은 바다에 사는 못생기고 투박한 물고기 같다. 못생기고 투박해서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물고기. 다른 것에 쉽게 비유하지 못하는 소리를, 첼로는 가졌다.
<레드 핫>을 보았던 열여덟의 밤. 따끈따끈해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품에 안았다. 쇼팽의 이별 곡을 연주하던 남자아이의 굵은 손가락이 아직 뜨거웠다. 로큰롤에 빠진 남자아이가 쇼팽을 연주하던 장면은 내가 사랑한 영화와 음악의 첫 만남이었다. 영화 속에서 음악을 만나고 음악 안에서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영화와 음악은 다른 이름을 가진 손가락이지만 손바닥에서 만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조슈아 벨의 바이올린 선율에 매료되어 본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 해안가 마을에 사는 늙은 자매는 어느 날 물에 떠밀려 온 의식 잃은 청년을 만난다. 청년에게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고 양복을 사서 입히고 회복할 수 있도록 극진히 돌본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늙은 여자 앞에서 청년은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여자는 나이를 버리고 얼굴의 주름을 애써 잊고 청년 앞에서 설레고 만다. 나는 아무 일 없이 끝나는 늙은 여자의 마음이 고독하기보단 아름다워서 영화의 여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나서, 늙은 여자는 계속 사랑할 수 있고 라벤더는 보랏빛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밤은 내가 자지 않으면 밤으로 남을 것이다. 날짜가 바뀌고 동이 터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애써 모른 척할 테다. 모른 척하고 오늘 밤을 사로잡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