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카나와 서울의 우리, 시차 없는 조용한 발작
"카나와 나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절망을 앓고 있다"
"일본의 10년 후는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이제 이 말은 폐기할 때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을 보는 내내 나는 확신했다. 내가 겪고 있는 서울이 스크린 속 도쿄에 있었다.
영화 속 '카나'는 폭력적이다. 얼핏 보면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저 이유 없이 자신의 악의를 폭발시킬 뿐이다.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된다. 이 행동은 어떤 사회적 풍자나 성격파탄이 아니라 그저 미래가 없는 세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것을.
카나는 부유하는 2030의 공포 그 자체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 성장은 멈췄고, 계급의 사다리는 걷어차였다. 거대한 구조적 절망 앞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연인에게 어리광을 부림과 동시에 상대를 지배하려고 드는 '가학적 양면성'이다. 기성세대는 "요즘 것들은..."이라며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만이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방어기제'라는 것을.
스크린 속 도쿄의 풍경은 내가 살고 있는 서울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숨 막히는 빌딩 숲, 희망 없는 공기, 술과 담배에 찌든 밤. 그들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다. 연애라는 이름의 '상호확증파괴'를 반복하며 서로의 바닥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카나가 무기력하게 사막 영상을 바라보다 뜬금없이 분노를 터뜨릴 때, 나는 그 공허한 눈동자에서 서울의 지하철 어딘가를 떠올렸다. 약관과 불혹 사이, 그 어디쯤을 부유하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진짜 사막은 아프리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 컵 하나조차 편히 놓을 수 없는 좁은 도쿄와 서울의 원룸 안에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말라죽어가고 있다. 물리적인 공간은 다르지만, 우리가 느끼는 절망의 시간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도쿄와 서울의 사이, 물리적 거리는 존재하지만 절망의 시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