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서 서툰 주부가 되어보니 비로소 알게 된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
1. Simple is best, 비워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복잡하게 생각하고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한다고 해서 꼭 좋은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명문이 단순한 문장에 많은 걸 담고 있듯이, 때로는 가장 단순한 선택지가 최고의 정답일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Simple is best'라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다. 최고의 인테리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 물건을 정리하겠다고 바구니를 사면 처음엔 깔끔해 보이지만, 결국 나중엔 그 바구니마저 또 다른 짐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던가.
2. 완벽한 여행의 비밀은 '우리'에게 있었다
조만간 떠날 제주 여행을 계획하며 "에이든 제주" 책을 빌렸다.
여행을 갈 때 1순위로 이동 경로와 소요 시간, 위치를 체크하는 내게, 지도가 잘 나와 있는 이 책은 완전히 내 스타일이다. 거창한 계획보다는 즉흥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지도를 보며 동선을 짜는 내 모습을 보니 ' P가 되고픈 J ' 인가 싶다. 초등학생 조카가 이모는 철저한 J라고 했다.
최근 4년 동안 매년 모임에서 제주도를 네 번이나 갔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기적에 가까운 팀워크 덕분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의 역할은 완벽하게 나뉘어 있었다.
나: 총무로서 비행기표와 숙소 예약, 부대비용 정산
JR 언니: 전체적인 코스 및 맛집 제안
KH 언니: 즉시 검색 및 실시간 예약
JY 언니: 자잘한 짐 정리와 주변 챙기기
SH 언니: 든든한 운전 담당
MY 언니: 여행의 즐거움을 책임지는 분위기 메이커
그런데 막상 이번 제주 여행을 혼자 준비해 보니 이게 보통 장난이 아니다. 날짜와 숙소를 혼자 정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되기 때문이다.
참나. 혼자인데, 내가 나를 구속하고 있더라.
숙소를 정하고 일정을 짜면서 '대충 숙소 근처 세화 해변이나 봐야지' 했는데, 올레길도 걷고 싶고, 근처 맛집, 책방, 소품샵, 카페까지 찾다 보니 찾다 보니 배가 산으로 가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다. 렌터카 하나를 빌리는 데도 대여 기간, 차종, 연식, 가솔린과 전기차 사이에서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느 하나 품이 들어가지 않는 게 없고 고민되지 않는 게 없다.
아, 내가 그동안 너무 편하게 제주를 즐겼구나. 새삼 언니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요즘 나는 감사한 것투성이다. 내가 이토록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건 온전히 내 능력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주변이 나를 보살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3. 옷가게 탈의실에서 깨달은 '역할이 만드는 자리'
옷가게에 가면 예쁜 옷들이 참 많다. 직장 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몇 년간 꽤 비싸고 고급스러운 옷들을 마구 사들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거대한 옷 무덤과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널브러진 각국의 깃발들을 다큐멘터리로 보게 되었다. '더 이상 환경을 오염시키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옷을 사는 빈도와 양을 확 줄였다.
그런데 올해 휴직을 하고 나니, 막상 편하게 입을 일상복이 없는 거다. 결국 후배를 불러 동대문 쇼핑을 가서는 '이건 꼭 필요해!'라는 핑계를 대며 티셔츠와 바지를 몇 벌씩 샀다. 그 순간만큼은 환경 보호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예쁜 옷을 옷장에 걸어두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하지만 그중 청바지 하나와 티셔츠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날 이후로 줄곧 옷장에만 걸려 있다. 과연 진짜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필요가 아닌 '마음의 소비'였을까?
예전의 나는 옷가게에서 옷을 입어보면 대체로 사는 편이었다. 점원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거울 앞에 비춘 내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사야 할 이유를 수십 가지씩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반면, 반면, 나와 달리 옷을 여러 벌 입어보고도 조용히 내려놓고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왜 안 사지? 안 살 건데 왜 저렇게 입어보는 거야?'라며 의아해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주부의 일상을 살아보니 그 마음을 정확히 알겠다.
탈의실에 들어갈 땐 '이번엔 꼭 하나 사야지' 다짐하지만, 막상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 나에게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아야 할 이유'들이 생각해 낸다. 이번 달 생활비, 아이 학원비, 그리고 '이게 당장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라는 현실적인 자각들.
"역할이 자리를 만든다고 했던가."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소비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고 과감했다. 하지만 휴직 후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보니, 나 자신보다 가족이 먼저 생각나서 지갑을 여는 것에 멈칫하게 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틀릴 가능성이 크지만, 쉼표를 찍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내 안의 작고도 큰 변화들이 참 흥미롭다.
4. 자동차 경고등 앞에서도 짜증 대신 여유를
얼마 전 차량 배터리가 방전된 이후, 계기판에 엔진 체크등과 미끄럼 방지 경고등이 동시에 켜졌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배터리 방전 후 흔히 뜰 수 있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그날 이후 두 번이나 운전을 했는데도 도무지 꺼지질 않는 거다. 차도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걱정이 되어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알아보겠다던 센터에서는 오늘 오후에 차를 가지고 방문하라고 했다.
직장을 다니던 평소 같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당장 짜증부터 났을 것이다. '아, 이 바쁜 와중에 어떻게 시간을 내서 가지?', '가는 길에 차가 막히면 어쩌지?' 온갖 걱정을 사서 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 뻔하다. 그리고 십중팔구 남편에게 슬쩍 이 골치 아픈 일을 미루며 휴가를 내라고 종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놀랍도록 여유롭다. 직접 서비스 센터에 예약을 하고 기꺼이 오후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 말에 남편은 "그래, 고생 좀 해줘"라고 답이 왔다.
만약 내가 온전한 전업주부로서 이런 일들을 늘 처리해 왔다면, 우리 가족 모두는 이 수고로움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행여나 다른 가족이 불편해할까 봐, 일이 커져 문제가 되지 않게 혼자서 조용히 감당하고 처리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부의 하루는 수많은 일들로 꽉 차 있어도, 정작 남들, 특히 가족들의 눈에는 그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이 잘 닿지 않는 것 같다.
나와 남편은 오랫동안 맞벌이를 해왔다. 그래서 아주 작은 변수 하나만 생겨도 서로의 시간을 팽팽하게 조율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피 말리는 조율을 할 필요가 없다.
오후 일정 하나를 온전히 내 의지로 채울 수 있는 이 조용하고 평온한 여유가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모른다. 쉼을 선택하고 마주하게 된 이 평범한 순간순간들이 요즘의 나에겐 그저 깊은 감사함으로 다가온다.